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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장아라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이준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이웃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키가 딱 그 정도였고 얼굴이 정말 작고 예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이준의 얼굴은 한층 더 싸늘해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 강이준과 이시연은 평소 일정을 공유하곤 했지만 최근 그녀의 화난 태도에 강이준도 그녀를 다독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연락을 피했다. 어제 서준태로부터 그녀가 보름 정도의 휴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오늘 그녀가 김건국과 안여정을 찾아와 불만을 털어놨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평소에 그렇게 나를 잘 챙기던 선생님 부부가 오늘은 왜 이리 까칠하게 구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 그는 옆에서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장아라를 흘끗 보며 이시연이 단지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인 것뿐만 아니라 속이 음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대문 앞에서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결국 안여정이 김건국에게 전화를 걸어 강이준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준아, 우리 지금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네.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보자.” 강이준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짧게 대답했다. “네.” 전화를 끊는 순간 그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가득 찼다. 그런데도 이웃은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물었다. “그분과 아는 사이예요?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강이준은 대답 대신 물었다. “오늘 김 선생님 부부가 집을 나가는 걸 보셨나요?” 이웃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침에는 못 봤지만 그분이 온 뒤로는 선생님 부부가 나가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분이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두 분이 도착했더라고요.” “두 분이 밖에서 한참 서 있는 걸 보고 궁금해서 나와봤어요.” 김 집사가 밖에 나왔던 건 짧은 시간이었고 이웃은 보지 못했다. 다만 이웃의 말은 강이준의 추측에 힘을 실어줬다. ‘이시연이 떠나자마자 선생님이 나를 부르고, 문밖에서 기다리게 한 이유가 뭐겠어. 분명 시연이 편을 들어 나한테 불만을 표현하는 거겠지.’ 장아라는 그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오빠, 너무 화내지 말고요. 혹시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둘이 그냥 조금 다퉜을 뿐이지, 시연 언니가 선생님 앞에서 오빠를 험담했을 리 없어요. 설령 무슨 말을 했다고 해도, 선생님은 사리를 잘 분별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고, 시연 언니랑 잘 이야기해 보세요.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빠가 이렇게 계속 무시하면 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장아라의 달래는 말에도 강이준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이미 모든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장아라는 오히려 이시연을 두둔했다. ‘아라는 이렇게 순수하고 따뜻한데 왜 시연이는 항상 아라를 못마땅해하는 거야?’ ‘고작 팔찌 하나 가지고 헤어지자더니, 이제는 선생님을 찾아와 일을 크게 만들어?’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른 강이준은 장아라를 집에 데려다준 뒤 바로 이시연이 사는 작은 원룸으로 차를 몰았다. “이시연!” 그는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였다. 옆집에 살던 이웃이 놀라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요, 그렇게 두드려도 소용없어요. 옆집 세입자는 이틀째 안 들어왔어요.” 강이준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탓에 이웃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혹시 위험한 사람인가 싶어 겁먹은 이웃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문을 닫아버렸다. ‘이틀 동안 집에 안 들어왔다고?’ 이시연이 이 원룸에 살기 시작한 건 그와 만나기 전부터였다. 이곳 외에는 그녀가 머무를 만한 다른 곳이 없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계속 바라봤다. 강이준이 참고 있던 분노를 억누르며 이시연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이었다. 그때 그의 사촌 여동생 강이서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강이준은 찌푸린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입도 열기 전에 강이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비서한테 들었는데, 시연 언니랑 헤어졌다고 하더라. 그럼 이제 아라 언니랑 사귀는 거 공식 발표하는 거야?” 강이서는 강이준을 무척 존경했고 이웃집에 살던 상냥한 장아라를 진심으로 따랐다. 그런 만큼 이시연에 대해서는 더욱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배경도 없고 힘도 없는 고아 주제에, 얼굴 좀 예쁘다고 우리 집안 최고 배우인 오빠랑 어울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강이서의 말에 강이준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이서야, 너 헛소리하지 마. 내가 언제 아라랑 사귄다고 했어?” 강이서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전 국민이 지켜보는 방송에서 그 구슬 팔찌를 아라 언니한테 줘 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오빠가 아라 언니랑 사귀지 않는다면, 언니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냐고?” 강이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구슬 팔찌가 왜?” “서, 설마 그 팔찌 어떤 건지 정말 몰라?” 강이서는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빠가 하백산에 가서 구해온 팔찌 아니었어?” 강이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무슨 소리야? 구슬 팔찌를 아라한테 줬다고 꼭 아라랑 사귀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하백산 이야기는 또 뭐야?” “진짜 몰랐어? 그럼 그 팔찌 어디서 난 거야? 하백산이 인연 비는 곳으로 유명하잖아. 그 구슬 팔찌도 하백산에서 인연 빌 때만 받을 수 있는 거야.” 이 말에 강이준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강이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 팔찌처럼 연꽃 무늬가 들어간 건 평안을 기원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잖아.” 강이준은 벽에 기대며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구슬 팔찌는 몇 년 전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이시연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막 사귀기 시작한 시기로 한창 뜨거울 때였다. 선물 자체는 그리 값비싼 것이 아니었지만 그 팔찌를 손목에 찰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쁨이 밀려들었다. 이시연은 그 팔찌가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라며 꼭 잘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 팔찌를 무려 5년 동안 차고 다녔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때의 이시연은 소녀다운 발랄함과 설렘이 가득했었다. 눈빛에는 사랑이 넘쳐흘렀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강이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오빠?” 강이준이 말이 없자 강이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부분 사람들이 다 알잖아. 그 팔찌가 인연 팔찌라는 거. 그런데 오빠가 그걸 아라 언니한테 줬으니, 벌써 온라인에서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 강이준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이내 머리가 멍해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단숨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구슬 팔찌는 이시연이 인연을 기원하며 준비한 것이었다. 이시연은 그 팔찌를 끼지 않는 건 받아들일 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준 건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시연이가 그렇게 난리를 쳤던 거였어.’ 헤어지자고 하고, 팀에서 나가겠다고 하고, 선생님께까지 찾아가서 하소연한 것도 다 그녀가 두 사람의 인연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려고 그랬을 터였다. “오빠?” “너 졸업 준비나 신경 써. 내 일에 상관하지 말고.” 강이준은 전화를 끊은 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이시연에게 전화를 걸 준비를 했다. ... 이시연은 김건국의 집을 나선 후 원래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 쉬려고 했다. 그러나 무심코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하백산 산언저리에 도착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산 위를 올려다보니 희미하게 사찰의 윤곽이 보였다. 이시연은 이곳에 세번을 왔었다. 처음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육씨 가문에 맡겨졌을 때였다. 그때 할머니가 부모님을 위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데리고 온 것이었다. 두 번째는 강이준을 위해서였다. 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정성껏 절하며 그의 평안을 기도했고 둘의 인연을 빌며 구슬 팔찌를 받아왔다. 세 번째는 강이준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감사의 뜻으로 기도드리러 왔고 그와의 인연을 더욱 굳건히 묶고자 다시 한번 하백산의 특별한 자물쇠를 걸었다. 세 번 모두 정성을 다하기 위해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갔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런 정성을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시연은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갔다. 산 위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외투를 여미며 사찰의 전각을 돌아 후원의 소원 나무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백 년을 살아온 노회한 느티나무는 여전히 무성한 잎으로 푸르렀다. 가지마다 걸린 하얀 천들은 소원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세 번째 방문 때 걸었던 자물쇠를 만져보았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물쇠는 녹슬지 않았고 함께 묶었던 하얀 천에 적힌 글씨조차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강이준과 이시연, 오래오래 함께하길.] 이시연은 손을 올려 천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서로 얽혀 있는 탓인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미 인연이 끊어진 사이인데 굳이 이토록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양손으로 천을 꽉 잡고 힘을 주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천이 찢어졌다. 하지만 울타리에 자물쇠는 여전히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가 강이준을 위해 걸어둔 평안 부적이 있었다. [강이준, 한평생 평안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길.] 이시연은 그것도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끝부분만 찢어졌고 하얀 천은 여전히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가위 같은 걸 찾아 완전히 떼어낼 수 있을지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강이준이었다. 이시연은 처마 밑으로 발걸음을 옮겨 방금 떼어낸 하얀 천을 바라보았다. 전화는 끊어지기 직전까지 울리다가 겨우 연결됐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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