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이시연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담담했다. 마치 얼음물 한 바가지가 강이준의 가슴 위에 쏟아지는 듯했다. 강이준은 눈빛을 더욱 차갑게 가라앉히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구슬 팔찌에 얽힌 사연을 이제야 알게 된 강이준은 생각했다. 설령 이 사실을 몰랐더라도 며칠만 기다리면 이시연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이시연이 예전처럼 그의 곁에 머물기를 바랐고 이번 이별 선언쯤은 없던 일로 치부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녀가 속상해하며 울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저릿하게 아팠다. 그러나 구슬 팔찌의 의미를 알게 된 후 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을 고의로 난처하게 만든 그녀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지금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냉담하고 단호한 태도에 강이준의 인내심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너 오늘 선생님 찾아가서 나 험담한 거 맞지? 그래서 일부러 나 곤란하게 하라고 하신 거잖아?” 이시연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야. 그런 적 없어.” 그러나 강이준은 비웃듯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 이렇게 가식적인 사람이었어? 할 건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강이준의 비난에 이시연은 잠시 멍해졌다. 전화를 든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너무나 낯선 말투였다. 정말 강이준이 맞나 싶을 정도로... 5년이나 함께한 사람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이시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침묵이 오히려 반성이라고 생각한 강이준은 더욱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왜 말이 없어? 선생님께 가서 뭐라고 말했는데? 우리가 싸웠다고? 그래서 날 혼내라고? 아니면 나더러 너한테 사과하고 잘해주라고 협박한 거야?” 이시연은 고개를 숙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리고 네가 날 달래주길 바라지도 않아.”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갑게 돌변했다. “이시연, 네가 아직도 나랑 만나고 싶다면 적어도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해야지. 우리 5년이나 함께했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내가 아직 널 사랑하는 건 맞아. 하지만 네 그 버릇없는 성격까지 다 받아줄 수는 없어.” “그 프로젝트를 원하면 지금 당장 회사로 와.” 이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은 못가.” 그제야 강이준은 그녀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시연에게는 딱히 많은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 육씨 가문에서 제멋대로 살아온 이시연의 오빠, 육서진이었다. 육서진은 학창 시절 종종 그녀를 데리러 오곤 했고 강이준은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이시연은 자신이 육씨 가문과 연관된 사람이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외부에는 그저 친구라고만 말했다. 강이준은 그녀가 남자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걸 싫어했기에 그녀도 그 뒤로는 육씨 가문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않았다. 게다가 육서진이 유학을 떠난 뒤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그와 연락이 닿을 때면 강이준은 질투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성심성의껏 그를 달래야 했다. 그러나 지금 강이준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벌써 새로운 사람을 찾은 건가?’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이시연은 찢어진 하얀 천에서 시선을 떼어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비웃듯 가볍게 말했다. “하백산이야. 올래?” 그 말에 강이준은 멈칫했다. ‘방금 이서가 말했던 기도하고 인연 팔찌를 받는다는 하백산? 설마 또다시 우리 인연을 빌러 간 건가.’ 강이준은 괜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프로젝트 이야기는 그때 나누자.” 이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할 말 다 했어? 다 했으면 끊는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전화를 끊고는 다시 찢어진 하얀 천을 바라봤다. ‘망가진 건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이시연은 천천히 돌아서서 산을 내려갔다. 강이준은 억눌렀던 화가 다시 끓어올라 사무실 문을 세게 차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는 이시연이 평생 꿈꿔온 것이 바로 김건국 같은 영화감독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 작품은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신중히 챙겨 얻어낸 것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날 이시연은 기쁨에 겨워 그의 주위를 맴돌며 마치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웃고 뛰었다. 이시연이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소중한 관계가 고작 구슬 팔찌 하나로 이렇게 망가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이준은 다시 메시지를 보내 그녀를 좀 혼내주려 했지만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어.” 강이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데뷔 5년 만에 스타덤에 올랐다. 운도 따랐지만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생명은 한정적이고 오래도록 버티려면 제작자로서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래서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 그녀를 위해 기뻐했던 만큼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서도 흥분했었다. “무슨 문제인데?” 매니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쪽 프로듀서가 이번 작품을 더 이상 시연 씨가 맡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태도가 돌변했어. 시연 씨가 아니라면 계약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 강이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계약서까지 다 썼는데,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거야?” 매니저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게... 프로듀서가 시연 씨 이름으로 된 계약서만 믿겠다고 했어.” 강이준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이런 X 같은 상황이 다 있나!” “이제 어떻게 할까?” 강이준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분노를 억눌렀다. “넌 일단 책임지고 그쪽을 안정시켜. 시연이는 내가 직접 설득할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시연이 아무리 강경하게 나와도 이번 프로젝트를 포기하진 않을 거라는 걸. 다음 날 이시연은 분명히 회사를 찾아올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를 직접 마주 보고 풀어야 할 것이다. 강이준은 그녀의 결단력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다음 날 이시연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그녀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추진해 온 일이었다. 자신의 직업적 신뢰를 지키고 투자자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강이준의 사무실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바로 강이준의 사촌 동생 강이서였다. 강이서는 여느 때처럼 과장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길게 그린 아이라인에 속눈썹은 인형처럼 두껍고 반짝거리는 아이섀도는 과하게 칠해져 있었다. 코는 음영으로 높아 보이게 했지만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시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강이서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 시연 언니가 왜 여기 왔어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반갑기는커녕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내가 와선 안 될 이유라도 있어?” 강이서는 비웃으며 대꾸했다. “여긴 오빠 사무실이잖아요.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와요? 오빠랑 헤어진 거 알거든요?”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우며 비아냥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언니가 제 발로 나가는 게 딱 언니 수준에 맞는 거야. 우리 오빠랑 사귀면서 언니는 계속 주제 넘으려고 했잖아. 그런데 아라 언니가 돌아오니까 결국 한계를 느꼈나 보네?” 이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몸을 훑었다. 강이서가 입고 있는 샤넬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얼마 전 이시연이 강이서에게 사준 옷이었다. 이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먼저 내가 사준 옷부터 벗고 나서 큰소리를 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