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어릴 때 허지민은 세 소년의 마음에 품은 짝사랑 상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 감정을 가슴속 깊이 숨길 뿐이었다. 그녀와의 차이가 너무 현저했으니까.
그녀는 배진호, 고경표와 인사를 나눈 후 강원우를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그가 퇴학을 당한 소식을 들었나 보다.
허지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퇴학을 당하는 건 미래를 망치는 거나 다름없기에 그가 너무 측은해 보였다.
그렇다고 강원우만 쏙 빼놓고 따돌릴 순 없으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원우야, 안녕!”
강원우는 아주 미세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스친 측은함을 바로 캐치했다.
약자들에게만 향하는 그 표정, 측은함 때문에 강원우는 가슴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웃으면서 인사했다.
“할아버지 뵈러 왔어?”
그는 이제 충분히 강대해졌으니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자신을 안 좋게 보거나 안쓰럽게 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본때를 보여줘야 하고 이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허지민이 머리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뵈러 왔다가 주기현 선생님도 찾아뵈려고. 내 면접 보려고 먼 길을 걸음 해주셨거든.”
배진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고동락 내 친구]를 부른 주기현 말하는 거야? 그분이 네 멘토가 돼준다고?”
허지민은 살짝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배진호 일행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가요계에서 주기현은 예나 지금이나 가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고동락 내 친구]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냈고 방송국에서는 심지어 그가 최근 20년 동안 가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칭송하며 스페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런 분을 멘토로 모시는 건 허지민의 음악 실력을 한 단계 올려주는 거나 다름없다. 배진호 일행은 그녀가 이제 마치 인생의 절정에 오른 것만 같았다.
앞날이 창창한 그녀는 적어도 이들 셋보다는 꽃길을 걸을 테니까.
그들 앞엔 무수한 허지민이 꿈을 좇고 삶을 충실하게 보내지만 정작 세 명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버렸다.
배진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10일에 너희 반이랑 우리 반이 함께 졸업파티를 열 건데 올 수 있어?”
아름다운 그녀가 참석하지 못한다면 졸업식의 막대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무조건 가야지.”
허지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허지민은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뒤로 넘기고 살살 부는 바람을 맞으며 아빠와 함께 골목으로 들어갔다.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모두가 마지막 스퍼트를 내고 있었다.
강원우는 전일고 학생들로부터 수많은 졸업 메시지를 받았는데 대부분 그와 잘 놀던 남학생들이었다.
다들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으니 마냥 고맙고 가슴 따뜻해질 따름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놀라운 건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메시지 한 장이었다.
그건 바로 간수연한테서 받은 졸업 메시지였다.
[매사에 긍정적인 태도와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어차피 인생의 선택지는 다양하니까 몇 년 후에 다시 만날 때 우리 모두 성공하길 바라.]
짤막한 메시지에 강원우는 무한 감동을 받았다.
수려한 외모에 날씬한 몸매를 지닌 그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실 강원우도 그녀가 농구장에 구경하러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남학생들은 더 열심히 뛰려고 노력했다.
사춘기 소년들은 누구나 여신의 주목을 받고 싶었고 그녀의 눈길 한 번에 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지냈다.
그런 간수연도 절대 예기치 못하겠지? 언젠가 강원우가 환골탈태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선택지는 다양하다고 했고 몇 년 후에 다시 만난다는 말도 꺼낸 거겠지. 강원우가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분발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격려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간수연이 어느 대학교에 갈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을 택하고 수업을 보러 갔다가 기적처럼 나타난 강원우를 쳐다볼 때 과연 얼마나 놀라는 표정을 지을지 벌써 기대됐다. 상상만 해도 풋풋하고 아름다운 화면이었다.
수능 전날 강천 고등학교나 전일 고등학교 모두 최후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드디어 졸업하고 대학에 간다는 기대를 품고 고3 학생들 전부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는 매년 관례대로 진행되는 의식이다.
다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전장에 나서기로 했다.
유독 강원우만 수능일을 묵묵히 기다렸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오늘 강진시 날씨는 그리 춥지만은 않았다.
아침에 창문을 여니 시원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강원우가 기상한 후 민수아는 늘 그렇듯 구운 식빵에 우유 한 잔을 차려줬다.
“편하게 시험 보면 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민수아는 맛있게 아침을 먹는 아들에게 말했다.
옆에서 강지한이 아들을 위해 삶은 달걀 껍질을 발라주었다.
“최선을 다해서 수능을 보면 되는 거야. 어떤 결과든 엄마, 아빠는 다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
부모님은 지금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강원우였기에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따낼게요.”
아들의 철든 모습에 강지한과 민수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노력만 하면 되지. 못 붙으면 어때? 까짓거 재수하지 뭐!”
아침을 다 먹은 뒤 강원우는 시험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서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그는 오늘 전일고에서 수능을 보는데 배진호, 고경표와 같은 시험장은 아니다. 하여 홀로 공공버스를 타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길거리에는 수능생들을 위해 준비한 선행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차들이 많지만 교통 관리가 철저하게 되어있고 버스 안에는 많은 학생들이 책을 놓지 않았다.
버스가 평온하게 달릴 때 강원우는 잠깐 눈을 붙였다.
불현듯 차 안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렸다.
눈을 뜨자 덩치 큰 체구의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 이제 곧 죽어. 그럴 바엔 너희들도 싹 다 데려갈 거야!”
그가 갑자기 한 노인에게 칼을 찔렀다.
노인은 치명타를 피했지만 허벅지가 칼에 찔려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너무나도 끔찍한 돌발상황에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남자는 노인을 찌른 후 또다시 버스 안을 누비면서 칼을 휘둘렀다. 몇몇 승객들은 피하지 못하고 칼에 찔려서 피를 흘렸다.
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사도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미치광이 남자를 지켜보던 강원우가 불현듯 어디서 난 용기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칼을 휘두르던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왜? 나 쥐어패게?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
그는 강원우의 가슴팍을 향해 칼을 찔렀고 노인이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학생, 조심해!”
한편 강원우는 마치 이 상황을 예지한 듯 가뿐하게 범인의 공격을 피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민첩하게 반응했다. 마치 범인의 모든 행동을 파악하기라도 한 듯 방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