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 또한 불가능할 것도 없다. 강천고의 수많은 시험지는 전일고에서 챙겨온 극비 자료이니까.
강원우가 강천고에 전학 오기 전에 이미 전일고에서 똑같은 시험지를 풀었고 선생님의 상세한 강의까지 들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하도진은 시큰둥한 표정에 수치심까지 들었다.
모의고사는 커닝할 수 있어도 대학입시까지 과연 가능할까?
그는 강원우에게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수능에 임해야 한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아침 자습시간이 끝난 후 하도진은 강원우를 사무실로 불러왔는데 놀랍게도 이 아이는 커닝에 들켰다는 당혹감과 수치심이라곤 전혀 없었다.
하도진은 어이가 없어서 먼저 질문을 건넸다.
“이번 시험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강원우가 먼저 자백하길 바랐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름 잘 쳤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직 총점도 모르고 선생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니 솔직하게 말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의 무구한 표정에 하도진은 버럭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끝까지 시치미 떼고 나를 능멸하는 거야?’
하도진은 책상을 힘껏 내리치고 본론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커닝하는 학생들이 제일 실망스러워. 그런 학생들은 영원히 좋은 대학에 붙을 수 없어. 그건 단지 자기기만이고 부모님을 속이는 수단일 뿐 현실은 바뀌지 않거든!”
강원우는 그제야 알아챘다.
‘지금 내가 커닝해서 성적이 잘 나왔다는 거잖아? 어쩐지...’
그는 무기력하게 서 있다가 꿋꿋이 대답했다.
“선생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아요.”
다만 하도진은 그의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강원우의 실력으로 절대 이런 점수를 따낼 수 없으니까.
“그래? 그럼 커닝 없이 어떻게 392점을 맞은 거지?”
강원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정상적으로 모의고사를 본 거죠.”
이번 시험 성적이 생각 밖으로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커닝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이토록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게 대답하니 하도진도 슬슬 망설이기 시작했다.
강원우가 전일고에서 똑같은 시험지를 풀었고 선생님의 문제 분석도 열심히 들었다면 지금 높은 성적을 따내는 건 커닝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저 수업을 열심히 듣고 관련 지식을 장악했다는 것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
하도진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입시 때도 지금 같은 성적을 유지하길 바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면 안 돼. 부모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지!”
강원우가 사무실을 나선 후 수학 선생님이 안경을 위로 올렸다.
“하 선생님, 원우가 정말 392점을 맞았어요? 국내 2위에 드는 명문대는 쉽게 붙겠는데요? 그럼 선생님도 역대급 기록을 내고 유명세를 떨치겠어요!”
하도진은 웃으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학 선생님의 말을 아예 새겨듣지 않았으니까.
국내 2위? 그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대학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학생들마다 공부에 지쳐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는 땡땡이치고 또 누군가는 수능에서 인생 역전을 노리며 밤낮없이 공부했다.
한편 강원우는 후자였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흡수 능력이 빠르지만 고3 지식이 크게 뒤처진 바람에 총점이 높아도 기본기가 탄탄하지 못했다.
하여 그는 이달에도 남들보다 열 배의 노력을 더 해서 공부에만 몰입했다.
강원우는 이제 더는 4년제 대학에 만족할 레벨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성적으로 가장 좋은 대학에 붙어서 이 학교의 기록을 경신하고 레전드로 남는 게 최종목표였다.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니 부모님도 흡족하기 마련이지만 평상시 처참했던 그의 성적을 되새기노라면 또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강원우는 이달 내내 책 속에 첨벙 빠져들었다.
전에는 일주일에 스스로 두 번씩 테스트하더니 어느덧 이틀에 한 번 격으로 시험지를 풀고 있다.
그는 또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매번 총점을 300점대로 유지했다.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오니 하도진도 마침내 경계를 내려놓았고 저번의 392점은 커닝이라고 확신했다.
공부 외에도 강원우는 릴렉스하는 타임을 많이 가졌다. 휴식 없이 공부만 하다 보면 역효과를 빚을 테니까.
그는 농구, 태권도, 탁구, 기타, 곡 작업 등등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몸의 변화를 일으킨 이후로 힘과 감각, 민첩도, 분석능력 등 모든 면에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발견했다.
전에 달리기 몇 킬로에 숨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마라톤을 홀가분하게 완주한다.
농구를 할 때 360도로 몸을 돌리면서 현란하게 골 넣기를 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전에 기타를 칠 때마다 선율을 장악하지 못하는 게 흠이었다면 지금은 노래를 한 번만 들어도 완벽하게 칠 수 있고 심지어 원작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또한 졸업한 제자들이 학교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미래를 향한 희망까지 담은 가사를 만들고 곡 작업까지 마쳐서 학교송을 SNS에 올렸다.
강원우는 본인이 만든 노래가 선율도 감미롭고 가사 내용도 풍부하다고 느껴졌다.
하학종이 울리자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아침에 하도진의 의심에 찬 눈빛 때문에 살짝 곤혹스러웠지만 이런 의심들이 곧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교문 밖에서 배진호와 고경표가 그를 기다렸다. 세 사람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대학은 어디 갈지, 어느 지역을 택할지 신나게 의논하고 있었다.
문득 화제가 졸업식 그리고 졸업 메시지로 돌아왔고 배진호가 먼저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했다.
“원우야, 다들 네 졸업 메시지를 기대하고 있어. 제대로 한번 해봐!”
“오케이.”
강원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일고에서 퇴학을 당했지만 고등학교의 우정이 가장 순수하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3년 동안 한 교실에서 함께 보내왔으니 그가 퇴학을 당했다고 무색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 모두 그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왔고 그 덕에 강원우도 강천고에서 더 나은 대학에 붙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아 참, 수능 끝나고 다음 날 2반이랑 3반 학생들 함께 졸업파티 열거든. 너도 잊지 말고 꼭 참석해야 해.”
배진호가 귀띔해주었다.
2반과 3반은 우애가 돈독하여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활동을 함께 해왔다.
세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구시가지에 돌아갔다.
저 멀리서 검은색 벤츠가 길옆에 세워졌고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차에서 내려왔다.
“허지민이다!”
고경표가 반가워하며 외치자 배진호와 강원우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씬한 몸매에 수려한 미모를 지닌 그녀가 긴 생머리를 흩날리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고경표의 절친인 그녀는 2반 학생이자 강원우, 배진호, 고경표와 함께 구시가지에서 커왔다.
강원우 일행과 소꿉친구로 지냈지만 나중에 집안 조건의 현저한 차이로 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벼락이 생겼다.
허지민의 아빠는 시대에 발을 맞춰서 기회를 거머쥐고는 부동산 업계의 걸출한 인물로 거듭났다.
사업 규모가 점점 커졌고 허지민도 구시가지를 떠나 이 도시의 가장 고급진 별장 구역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예쁜 데다 가정환경까지 우월해서 그야말로 완벽할 따름이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고 현재는 국내에서 유명한 뮤지션 주기현의 제자로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