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문구점 앞에서 배진호와 고경표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소꿉친구인 두 사람을 보더니 강원우도 간만에 얼굴에 미소가 띠었다.
고경표가 먼저 그의 옆으로 다가와 가슴팍을 두드리며 관심 조로 물었다.
“대머리가 너 퇴학시켰다며? 그 인간은 진짜 못돼먹었다니까!”
배진호도 씩씩거렸다.
“그럼 이제 수능은 어떡해? 대학입시 못 보는 거야?”
절친들의 관심에 강원우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오늘부터 강천고 다니거든.”
둘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진호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진짜 잘됐네! 강천고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무조건 수능 잘 봐야 한다. 대머리한테 본때를 보여줘야지.”
한때 그의 성적이 아무리 엉망진창이어도 두 친구는 격려만 보내왔다. 이에 강원우도 서서히 어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
이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이 코를 찔렀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그 소녀는 바로 간수연이다.
강원우를 발견한 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었다.
“원우, 안녕!”
그녀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강원우는 저도 몰래 마음이 설렜다.
“안녕.”
곧이어 그는 간수연의 손에 든 시험지를 발견했다.
“이거 나도 한 부 줄 수 있어?”
간수연은 그가 왜 시험지를 요구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졌다.
‘이제 공부하려고 그러나?’
그녀는 얼른 시험지를 한 장 건넸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은 너무 짧아. 기적을 바랄게, 원우야.’
그녀와 헤어진 후 강원우는 고경표, 배진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운명을 바꿀 대학입시를 한 달 앞두고 강원우는 여느 때보다 침착하게 공부에 매진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당황한 게 아니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제집부터 풀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스펀지처럼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의 지식까지 쏙쏙 흡수했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강지한과 민수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지한은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우가 지금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결과가 어떻든 다 받아들일 거야. 전문대에 붙어도 우리 가문의 영광이고 정말 못 붙는다고 해도 다음 해에 재도전하면 되잖아.”
아침 햇살이 학교의 오솔길을 따스하게 비추고 배진호와 고경표는 늘 그렇듯 강원우의 집 앞까지 찾아와서 다 함께 학교로 향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커온 세 사람은 강원우가 한때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편견을 갖거나 따돌리진 않았다.
그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다들 한편이 되어 함께 역경을 뚫고 나갔다.
교실에 도착하니 몇몇 학생들은 아침 공부에 열중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서 아침을 먹거나 소설을 보거나 잠을 자기 일쑤였다.
강원우는 이런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또다시 공부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아침 자습시간이 끝난 후 담임 하도진이 시험지를 한 뭉치 들고 들어오며 모의고사를 치를 거라고 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모의고사는 밥 먹듯이 흔한 일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시험 시간에 대놓고 잠을 자겠지만 강원우는 성적을 테스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모의고사를 통해 성적이 제고됐는지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한 문제라도 빠트릴까 봐 온 정신을 다 해 모의고사를 치렀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하도진의 사무실에서 한국사 선생님의 열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반에 강원우라는 전학생 왔다고 했죠?”
한국사 선생님은 안경을 올리면서 흥분 조로 말했다.
“네, 그런데요? 또 무슨 사고 쳤어요?”
한국사 선생님은 잔뜩 흥분한 채 시험지를 한 장 뽑아서 하도진에게 건넸다.
“한국사 시험을 글쎄 97점이나 맞았어요. 너무 대단하네요!”
하도진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천고에서 한국사 성적이 80점에 달하는 학생도 매우 우수한 편인데 강원우가 글쎄 97점을 맞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영어 선생님도 가까이 다가오며 하도진에게 말했다.
“그러네요. 진짜 97점을 맞았군요. 공부 엄청 잘하나 봐요.”
하도진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이 점수는 강천고에서 으뜸가는 수준이니까.
그는 참지 못하고 국어 선생님 사무실에 찾아가서 초조하게 물었다.
“지 선생님, 어제 모의고사 채점 다 했죠?”
국어 선생님 지한경은 고개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시험지를 건넸다.
“그럼요! 하 선생님 반에 강원우라는 전학생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던데요? 작문이 너무 완벽한데 만점 주기 뭐해서 2점만 깎았어요.”
하도진이 국어 시험지를 받았는데 성적이 무려 98점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수학 선생님 사무실로 달려갔는데 뜻밖에도 수학 선생님이 먼저 반겨주었다.
“강원우 학생 수학 시험에서 99점 맞았어요! 너무 대단하네요.”
하도진은 그의 성적에 입이 쩍 벌어졌다. 국어 98점, 수학 99점, 영어 98점, 한국사 97점, 총점이 무려 392점이었다.
성적표에 커다랗게 적힌 총점에 그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모의고사 난도가 그다지 높진 않지만 392점이란 총점은 충분히 파격적인 결과였다.
이 점수라면 국내에서 2위 안에 드는 명문대는 충분히 갈 수 있고 절대 강천고에서 나올 수 없는 성적이다.
2년 전에 강천고에서 거금을 들여 공부의 신이라 불리는 학생을 한 명 모집했지만 그마저도 남원 대학교에 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는 강천고의 최고의 성과였고 그 학생 덕분에 명성이 높아졌으며 더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전일고에서 퇴학을 당한 학생이 392점을 맞았고 국내에서 2위 안에 드는 명문대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이건 마치 한여름 밤의 꿈 같아서 믿어지지 않았다.
하도진은 충격에서 벗어나 재빨리 분석에 나섰다.
이 세상에 결코 바보는 없다. 특히 전일고처럼 베테랑 선생님들이 많은 곳에서 강원우가 늘 이런 성적을 유지했다면 그를 퇴학시킬 리가 있을까?
또한 그는 전일고에서 총점이 줄곧 200점대를 맴돌았는데 단기간에 이토록 놀라운 제고를 얻을 수 있을까?
전일고는 매년 전국 2위에 드는 명문대에 입성하는 학생들이 나온다. 다들 그런 학생들을 행여나 다른 학교에 빼앗길까 봐 보물처럼 다루는데 퇴학을 시키는 건 당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강원우가 커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