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여인에 대한 동질감 때문인지, 유세정은 안쓰러운 얼굴로 노은정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이에요. 하지만 괜찮아요. 이혼만 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예요. 윤빈 오빠 실력 꽤 좋으니까 믿으셔도 돼요.”
‘그래. 가장 어려운 협의서에 사인하는 걸 도와줬으니까.’
노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스럽게 응대했다.
“세정 씨 사건도 강 변이 맡았다고 들었어요. 분명 최선을 다했겠죠.”
유세정의 얼굴이 쑥스러움으로 빨갛게 물들더니 자랑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래요. 윤빈 오빠가 이번에 큰 도움을 줬어요. 저 도와서 전남편 기소할 증거도 수집해 주고 제 신변안전까지 보호해 줬고요. 오빠 아니었으면 전 아마 그 미친 놈이 휘두른 칼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세상 행복한 얼굴로 불편한 과거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노은정은 잠깐 침묵하다가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졌다.
“세정 씨, 강 변 좋아해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유세정이 흠칫하더니 오랜 고민 끝에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이웃집 오빠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어릴 때부터 항상 같이 놀고 저를 많이 챙겨줬고요. 별거 아닌 날에도 선물도 많이 사줬어요. 학교 다닐 때 누가 저 괴롭히면 가장 먼저 나서서 싸워준 사람도 오빠였고… 제가 이혼한다니까 오빠가 먼저 연락해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어요. 나중에 우리 오빠한테 들어서야 알았어요. 윤빈 오빠가 사실은 정말 오랫동안 저를 짝사랑해 왔다는 것을요.”
“윤빈 오빠 같이 고고한 남신이 저를 짝사랑하다니. 사실 저 뭘 보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주절주절 얘기하는 유세정의 말을 들으며 노은정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유세정의 입을 통해 그녀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던 강윤빈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냉담한 게 아니라 단지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다가가고 싶은 대상이 그녀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홀딱 빠져서 아까운 10년을 허비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달콤한 회상에 잠긴 유세정은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노은정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유세정은 이미 노은정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언니로 생각하고 약간은 선을 넘는 질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은정 언니는 윤빈 오빠를 어떻게 생각해요?”
노은정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서 속셈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이미 텅 비어진 과거의 집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강 변과 10년을 알고 지냈어요. 하지만 최근에 와서야 내가 진짜 강윤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세정 씨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난 강 변이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유세정은 깊게 고민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자, 그녀는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자며 노은정을 잡아끌었다.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온 강윤빈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전혀 내키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고 노은정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녁에 일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요. 제 볼일은 이미 끝났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강윤빈은 두 남매에게 더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노은정을 부축해서 차에 태웠다.
“두 사람은 일단 집으로 가 있어. 난 은정이 데려다주고 그쪽으로 갈게.”
짐을 실은 트럭이 승용차를 따라 아파트단지를 나섰다.
강윤빈은 뭐라도 해명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초조하고 불안했다.
노은정이 먼저 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결혼 전에 이미 약속된 거잖아. 쌍방 부모님 제외하고 대외적으로는 잠시 공개하지 말자고. 두 사람 다 준비가 됐을 때 공개하자고 당신이 그랬잖아? 당신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거 알아. 이해해.”
강윤빈은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그녀의 부드러운 말을 듣자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는 긴 한숨을 쉬고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사실 그동안 당신이랑 함께하면서 천천히 이 결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아.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그때 가서 공개하자.”
노은정은 무심한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혼한지 3년이나 되었어도 공개하지 않은 관계인데 더 기다리라니.
그녀는 더 이상 기다려 줄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