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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가는내내 노은정은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강윤빈은 최근 들어 그녀의 기분이 확연히 다운된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최근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그가 최근에 유세정 사건 때문에 바빠서 그녀를 너무 외롭게 해서 서운해한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오자 그는 간만에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곧 결혼 3주년 기념일인데 그때 가서 우리 여행이나 갔다오자.” 숙려기간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노은정은 더 이상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 부상을 이유로 거절했다. 강윤빈도 너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시내에서 가고 싶은 곳을 골라보라고 했다. 하지만 노은정은 그것도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거절했고 결국엔 둘만의 시간을 보낼 장소를 찾지 못했다. 예전에 데이트한다면 날듯이 기뻐하던 모습과 너무 상반되는 냉담한 반응에 강윤빈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당혹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노은정은 그가 낌새라도 눈치챌까 먼저 제안했다. “그날 마침 주말이더라. 같이 학교나 한번 다녀오자.” 이제 와서 갑자기 과거라도 회상하고 싶어진 걸까? 그녀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렵게 제안한 그녀의 청을 거절하기 싫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노은정은 달력을 펼치고 잇닿아 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9월 7일은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날이었고 9월 6일이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자, 그녀가 짝사랑한지 꼬박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날, 그녀는 처음 이야기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지나간 10년의 청춘을 위해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노은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좀 좋아져서 그런지 목소리도 상쾌했다. 그녀는 농담 던지듯이 그에게 물었다. “이번엔 바람 안 맞힐 거지?” 강윤빈도 간만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언제 당신을 바람 맞혔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많이 억울하지.” 노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그에게 바람 맞힌 날들을 떠올렸다. ‘지난번, 당신은 유세정이랑 바닷가에 간다고 날 홀로 병원에 내버려뒀었지.’ ‘그리고 그 지난번엔 유세정 도와서 증거를 수집한다고 내 생일날도 잊었고.’ ‘유세정을 위로하러 간다고 날 홀로 인적 없는 교외에 두고 간 적도 있었어.’ 그 전에도 여러 번, 유세정과 관련된 일이면 그는 항상 열일 제쳐두고 뛰어나갔었다. 이어지는 일주일 동안 강윤빈은 한 번도 귀가하지 않았다. 노은정이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벽걸이 달력을 찢는 일이었다. 그녀는 홀로 텅 빈 집에서 천천히 마지막 물건들을 정리했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어느새 약속 날짜인 9월 6일이 돌아왔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몇 년 전에 사두었던 원피스를 입은 후에 카메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기념비적인 날을 사진을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도착한 강윤빈은 아래층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자상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곧 해방이라서 그런지 노은정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래서 가는 길에 그와 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지난 이야기가 오가면서 차 안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더 화기애애했다. 강윤빈도 점점 긴장을 풀고 그녀에게 이따가 사진 많이 찍자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의 모교인 S대 앞에 도착했다. 노은정은 먼저 차에서 내려 그를 기다렸다. 강윤빈이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윤빈 오빠, 지금 시간 돼? 나 고열 때문에 죽을 것 같아. 혹시 집에 와서 나 좀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어?] 노은정은 한참 기다려도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고민에 잠긴 그의 표정을 보았다. 곧이어 그가 결정을 내린 듯, 차 창을 열었다. “로펌에 일이 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노은정은 예견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그에게 물었다. “한 시간만 있다가 가면 안 돼?”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있을까?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래. 안 될 것 같아.” 단호한 그의 대답에 노은정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빈은 다시 안전띠를 매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택시 타고 먼저 집에 가 있어. 내가 바쁜 일만 처리하고 우리 어디라도 다녀오자. 그리고 시간 되면 교수님들이랑 식사 한번 하고.” 노은정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강윤빈, 이제 다음은 없어.’ 그녀는 멀어지는 차량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카메라를 들고 교문에 들어섰다. 그렇게 30분이 걸려 그녀는 청춘의 추억이 깃든 곳들을 한번씩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다. 학교를 나온 그녀는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SNS에 접속하자 새로 업로드 된 유세정의 게시글이 보였다. 병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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