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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갑자기 그건 왜?” 민준혁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되물었다. “언니가...” 소은혜는 머리를 푹 숙였다. “실은 어제 오빠랑 지호 오빠가 나간 뒤에 언니가 줄곧 창밖으로 지호 오빠 내다봤어요. 성격도 좋고 대학생에 얼굴도 잘생긴 데다 어머님이 또 고등부 교무부장이라면서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지호 오빠도 부대 단지에 산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인지 오늘은 아침 일찍 외출했어요 언니.” 평온하게 달리던 차가 급정거했고 민준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짙은 눈동자에 살벌한 한기가 어렸다. ‘그럼 그렇지. 오자마자 지호한테 질척거리는 거야?’ 부대 병원에 거의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그는 하마터면 다시 돌아가서 소은비를 찾을 뻔했다. “언니도 다들 허락하지 않을 걸 알아서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만약 지호 오빠 여자친구 있다면 제가 가서 언니 타일러볼게요.” 소은혜는 마냥 얌전한 척하며 말했다. 소은비를 전당 마을로 쫓아버릴 수만 있다면 더는 사사건건 그녀와 비교할 일도 없고 자꾸 딴 사람들에게 민준혁의 맞선 상대라고 오해를 당하게 할 일도 없다. 소은비는 예쁘장한 얼굴을 빼면 뭐가 더 있을까? 이 집안 막내는 소은혜이고 공부도 잘해, 말도 잘 들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데 대체 왜 어려서부터 어른들은 늘 소은비를 더 칭찬하고 예뻐해 주고 항상 그녀더러 언니한테 양보하라고 하는 걸까? 소은비와 함께 있으면 모든 이가 그녀에게 신경이 쏠리고 소은혜는 항상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그녀는 반드시 소은비를 무참하게 짓밟아버려야만 했다. 한편 민준혁은 아무 말 없이 핸들을 꽉 쥐고 계속 앞으로 달렸다. 검은 눈동자에 어둠이 드리운 것처럼 점점 더 짙어져 갔다. 부대 병원 정형외과에 도착한 후 의사가 일련의 검사를 마치고 상처가 거의 나았다면서 흉터에 바르는 연고를 처방해주었다. 민씨 저택에 돌아오니 어느덧 열 시가 다 돼갔는데 오수미 홀로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을 뿐 소은비는 보이지 않았다. 민준혁은 곧장 고모네 댁에 찾아갔지만 고모 홀로 집에 있고 정지호는 아침 일찍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야외로 낚시하러 갔다고 한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시계를 들여다봤다. 이제 남은 외출 시간은 세 시간뿐이다. 부디 정지호가 그의 경고를 새겨듣고 소은비와 함께 있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시 차를 몰고 부대에 돌아갈 때 양 갈래 머리에 꽃무늬가 새겨진 헌 옷을 입은 소은비가 홀로 뜨거운 햇살을 내리쬐며 오동나무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랫동안 걸었던지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됐고 목에 땀방울이 맺혔다. 앞머리도 땀에 흠뻑 젖어 손수건으로 가끔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줌마가 서 있었고 소은비는 옆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다. 그녀는 작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너무 먹고 싶어서 침을 꼴깍 삼켰지만 끝내 돈이 없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민준혁은 차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따라가며 이 모습을 낱낱이 지켜봤다. 아마도 그녀는 정지호를 못 찾고 목적 없이 거리를 누비는 모양이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앞을 바라볼 뿐 그녀를 챙겨주지 않았다. ‘넌 이참에 따끔하게 혼나야 해.’ 사실 소은비는 살짝 길치라서 김미자 아줌마와 함께 고용주의 집까지 갔지만 다시 나올 때 민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렸다. 마침 정오 시각이라 뜨거운 햇살이 쨍쨍 내리쬐었다. 그녀는 무더위에 찜질하듯 온몸이 뜨겁고 땀에 흠뻑 젖어서 셔츠가 다 축축해졌다. 덥고 갈증이 나서 미칠 지경이지만 나올 때 돈을 챙기지 못해 꾹 참으며 민씨 저택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집에 도착한 후 소은비는 물을 두 컵이나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다시 살아날 것만 같았다. 오수미는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관심 조로 물었다. “어때요? 합격했어요?” “네.” 소은비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렇게까지 순조로운 줄은 몰랐다. 고용주 부부는 지적이고 자애로운 분들이었다. 소은비가 너무 어려 조금은 망설였지만 부대에서 소개서를 써줬고 또한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방학 기간을 이용해 학비를 벌고 싶다는 말에 선뜻 고용했다. 내일 아침 짐을 싸서 그리로 가면 된다. 심지어 그녀만의 단독 방까지 차려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진영자와 소은혜는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소은비는 이때다 싶어 서재로 가서 내일 가정부 일을 시작한다고 민용수에게 알렸다. 민용수는 몹시 놀랍고 의외였다. 또한 자신의 추측을 재차 확신하게 되었다. 소은비가 만약 나태하고 이기적이라면 진안에 오자마자 뭣 하러 학비를 벌겠다고 일자리를 찾아 나설까? “은비야, 학비는 걱정 안 해도 돼. 방학 기간에 뭐라도 경험을 쌓고 싶다면 그렇게 해. 대신 공부도 꼼꼼히 해야 한다.” 민용수가 의미심장하게 당부했다. “나중에 고등학교 졸업하거든 진안에서 분명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야.” “네, 걱정 마세요 아저씨. 저 꼭 열심히 공부할게요.” 소은비는 원주인의 성적을 잘 알기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붙을 거라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줄 것이다. 그녀는 서재에서 나와 욕실에 들어가서 샤워했다. 맨 마지막 순서로 씻는 거라 샤워를 마친 후 사람들이 벗어놓은 옷들을 하나씩 깨끗이 빨았다. 심지어 불을 끄고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는 달빛을 마주하여 옷을 빨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전력난이 심해서 야간 전기요금이 매우 비쌌다. 일부 지역 특히 시골 지역은 밤에 전원이 차단되어 TV도 볼 수 없고 다음 날 다시 보기만 가능했다. 그녀가 옷을 빨아준 이유도 오수미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경제가 힘든 이 시대에 오수미 덕분에 바로 일자리를 찾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한창 빨래하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소은비가 고개를 돌려보니 불빛에 드리운 훤칠한 실루엣이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반듯한 자세는 딱 봐도 부대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 화장실 쓰시려고요? 잠깐만요.” 소은비는 자연스럽게 민용수인 줄 알고 손에 묻은 거품을 툭툭 털고 옷을 옆으로 치웠다. 은은한 달빛이 그녀의 몸에 드리워졌다. 금방 씻은 검은 생머리가 어깨에 흩어지고 날씬한 몸매가 더더욱 아름답고 청초하게 다가왔다. 위에는 면 소재의 민소매를,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백옥같이 새하얀 속살을 훤히 드러냈다. 곧고 늘씬한 두 다리는 정성껏 조각한 것처럼 완벽 그 자체였고 나른한 허리를 살며시 숙이니 뒤에 있던 사람은 순간 온몸이 경직됐다. 그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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