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정지호는 저도 몰래 허리를 곧게 폈다.
‘내 생각이 맞았어. 형은 지금 은비가 마음에 든 게 분명해. 그러니까 뜬금없이 나한테 가혹한 거잖아.’
한편 소은비와 소은혜가 식사를 마친 후 진영자는 오수미더러 소은혜의 짐을 미리 정리해둔 2층 방으로 옮겨가라고 했다.
“은비야, 실은 너까지 진안에 올 줄은 몰랐어. 집에 빈방이 하나뿐이고 은혜가 또 다리를 다쳤잖니. 너는 아줌마랑 한방 쓰렴. 그래도 되겠지?”
진영자가 마른기침을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네, 그럼요, 할머니.”
소은비는 흔쾌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도맡았다.
이를 본 소은혜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혜 넌 다리도 상했고 1박 2일 동안 기차를 탔으니 일찍 올라가서 쉬어. 아줌마가 치우면 돼.”
진영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얼른 내려놓으세요. 제가 치우면 돼요.”
오수미는 소은혜의 짐을 들고 그녀를 부축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무 계단에 선 소은혜는 설거지하러 들어가는 소은비를 보더니 야유에 찬 미소를 날렸다.
‘할머니랑 아저씨는 모두 날 더 좋아해. 분명 날 오빠의 신붓감으로 인정해주셨을 거야.’
실은 민용수도 소은비더러 방에 돌아가 일찍 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진영자가 곁눈질하며 그를 말렸다.
거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된 후에야 민용수가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
“엄마, 은비한테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그냥 두 사람 같은 방 쓰게 하면 되잖아요. 한 침대에서 못 자는 것도 아니고요.”
진영자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민용수를 힐긋 쳐다보며 분부했다.
“이따가 지영이한테 전화해서 지호 잘 다스리라고 해. 절대 은비랑 접촉하지 못하게 말이야.”
“엄마, 대체 왜 그래요?”
민용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호가 은비 과외 해주면 개학해서 성적이 좀 더 오를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걔 그거 일부러 조신한 척하는 거야. 준혁이가 전화로 한 말 다 잊었니?”
진영자가 코웃음 쳤다.
“은비 걔 준혁이랑 결혼하려고 제 동생도 죽일 뻔한 애야. 게다가 강에 뛰어들면서까지 준혁이를 강요한 애가 진안에 공부하러 왔겠니? 분명 더 좋은 상대를 얻으려고 온 거야. 혹시 알아? 지호한테 수작을 부릴지.”
“엄마, 무슨 일이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요. 귀로 전해 듣는 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에요. 오늘 은비 보니까 준혁이가 전화로 말했던 것과 아예 딴판이었잖아요. 이 안에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
민용수는 진중한 목소리로 엄마를 타일렀다.
그는 군부대에서 높은 직위에 머물러있어 사람 보는 눈이 그 누구보다 예리하다. 잘 훈련된 스파이도 그의 앞에선 한두 마디에 바로 들통나게 되어있다.
좀 전에 일부러 소은비 앞에서 소은혜에게 선물을 건네며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려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겸허한 태도로 임했고 맑은 눈동자에는 어떠한 불쾌감과 질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준혁이가 일부러 마을 이장을 찾아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야 너한테 보고했다잖아. 오해는 무슨 오해?”
진영자는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감히 반박하지 못할 강경한 태도를 드러냈다.
“내 생각은 변함없어. 걔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뒷바라지할 테지만 갖은 수단으로 부대 단지에서 이리저리 흘리고 다니면 당장 고향 마을로 보내버릴 거야. 앞으론 은혜만 잘 챙기고 잘 키워주면 돼.”
말을 마친 진영자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소은비는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까지 깨끗이 닦은 후 거실에 있던 두 분이 다 떠나고 나서야 주방에서 나왔다.
주방 문이 마침 거실을 마주하고 있었고 진영자는 일부러 그녀를 들으라고 그렇게 말했다.
실은 기차 타고 올 때부터 소은비는 계획이 있었다. 방학 동안 가정부로 일할 집을 찾아서 그 집에서 지내면 민씨 저택에 얹혀살 필요가 없었다.
하여 오수미를 볼 때도 한없이 해맑은 눈빛으로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이제 또 할머니 덕분에 오수미와 한방을 쓰게 됐으니 모든 게 그녀의 뜻대로 되어가는 중이었다.
오수미는 아래층에 내려온 후 깨끗이 정리된 주방을 보며 마음이 흐뭇했다. 그릇이며 싱크대까지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그녀가 딱히 더 할 게 없었다.
‘예쁜 줄만 알았더니 엄청 부지런하고 행동도 빠르네.’
“아이고, 은비 씨는 손님인데 왜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얼른 방에 돌아가서 쉬어요.”
“아니에요, 아줌마. 저랑 은혜가 와서 아줌마도 두 사람 몫으로 할 일이 더 늘어났잖아요. 밥도 두 사람 몫을 더 지으셔야 하고요. 번거롭게 굴어서 정말 죄송해요.”
소은비는 진심을 담아서 사려 깊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던지라 오수미는 그녀가 더더욱 좋았다.
두 자매가 적어도 1년은 여기서 지낼 테니 가정부로서 할 일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기존에는 늘 그래왔듯 5인분의 음식만 차리면 되는데 이젠 어느덧 7인분으로 준비해야 한다.
빨래도 두 명이 더 늘어나서 여름엔 그렇다 쳐도 겨울엔 옷만 빨다가 손이 꽁꽁 얼어붙고 굳은살이 박일 것이다.
게다가 연세가 많은 진영자와 아직 어린 민서아까지 챙겨야 하니 오수미는 종일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줌마도 그렇고 아저씨를 번거롭게 굴까 봐 이번 방학에 밥하고 빨래하는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해요. 아줌마처럼 아이 돌보는 것도 가능하니 학비도 벌 겸 가정부를 한번 해볼까 하는데 혹시 소개해줄 만한 곳...”
소은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수미가 덥석 손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마침 잘됐어요. 전에 야채시장 갔다가 학교 교장 집안에서 일하는 가정부 미자를 만났는데 남편이 일하다가 다리가 부러졌다면서 고향에 내려가서 돌봐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교장 집안에 밥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대타를 찾아야만 갈 수 있대요. 은비 씨가 정말 해볼 생각이 있다면 내일 아침에 야채시장에서 분명 또 만날 테니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
“고마워요, 아줌마. 그럼 내일 아침 저도 같이 가요. 대신 짐도 좀 들어드릴게요.”
소은비가 달콤하게 속삭이며 눈웃음을 짓자 아름다운 보조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에 오수미는 마치 달달한 사탕이라도 먹은 것처럼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토록 살갑고 다정한 아이를 진영자와 민준혁은 대체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
두 자매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너무나도 극명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새벽 네 시 반, 소은비는 오수미와 함께 일어나 밥을 짓고 채소 사러 야채시장에 나갔다.
민준혁이 소은혜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할 때 온 가족이 식사를 마쳤고 민용수도 회의하러 부대에 나갔다.
거실에 소은비가 안 보이자 민준혁은 그녀가 아직 방에서 잘 거라고 여기며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 소은혜와 함께 다리의 상처를 보이러 부대 병원에 갔다.
조수석에 앉은 소은혜는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민준혁이 친히 안전벨트를 매주니 저도 몰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는 길에서 그녀는 까맣게 탄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잡고 있었다.
어젯밤에 2층 계단 입구에서 할머니가 하신 말을 몰래 엿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열심히 운전하는 민준혁을 바라보며 살짝 겁에 질린 듯 머뭇거리다가 질문했다.
“오빠, 지호 오빠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