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당신이 내 엄마야? 내가 어떤 남자를 찾든 당신이랑 뭔 상관인데?”
안이서는 안채아 옆으로 다가가 안쓰러운 눈길로 언니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제야 알아챘다. 언니가 가정폭력을 당했던 이유가 전부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만약 안채아가 고분고분하게 안이서의 현재 상황을 알려줬다면 소현정도 굳이 이렇게까지 그녀의 집을 들쑤시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하율이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있어. 더 있으면 애 놀라서 안 돼.”
안이서는 귀여운 조카를 달랬다.
“하율이 착하지. 이모 왔어. 이젠 다 괜찮아질 거야.”
“이모...”
전에는 엄마, 아빠만 부를 줄 알던 양하율이 문득 이모라고 말을 내뱉자 오히려 어린아이가 안이서를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다.
두 자매는 기쁜 것도 잠시, 속으론 여태껏 서로 의지하며 악착같이 살아온 나날이 고달프고 씁쓸하게 느껴졌다.
“착한 하율이 엄마랑 같이 방에 들어가서 이모 기다려.”
안이서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슬픈 마음을 애써 달랬다. 안채아는 여전히 불안한 심정으로 아이를 안고 침실에 들어갔고 안이서가 밖에서 문을 꼭 잠갔다.
그제야 발견했는데 형부는 이 늦은 시간까지도 귀가하지 않았고 집에는 나인숙과 안채아, 그리고 한 살도 안 된 하율이만 남아있었다.
어쩐지 소현정이 이때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더라니, 안채아의 집에 남자가 없는 틈을 타서 다짜고짜 쳐들어온 것이다.
한편 소현정을 무서워할 안이서가 아니지. 어려서부터 언니보다 성격이 세고 단 한 번도 소현정에게 기가 눌린 적이 없었다.
“불만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비겁하게 형부 없을 때 여기까지 찾아와서 소란을 피워요? 약자한테만 강한 척하는 비겁한 인간!”
안이서는 이젠 언니와 하율이를 방에 들여보냈으니 더 이상 걱정될 게 없었다.
“너 지금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거야? 내가 너 안 찾았니? 대체 이게 무슨 말버릇이야? 좋은 마음으로 신랑감도 찾아주고 이참에 집안 부담도 조금 덜어줄 줄 알았더니 뭐? 밖에서 딴 남자나 만나고 내 전화를 차단해?”
소현정은 말하면서 안채아의 집 문 앞에 다가가더니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고생해서 키운 딸이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더니 이 어미도 외면하네! 다들 나와서 한번 봐봐요. 어디 이런 경우가 다 있대요?!”
나인숙은 안 그래도 소현정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게 생겼는데 계단에 앉아서 울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안이서가 나인숙을 부축하여 소파로 모셨다. 다시 나와보니 아래에 있던 백지효가 한 층 올라와서 소란을 피우는 소현정 뒤에서 몰래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백지효는 안이서에게 쉿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고 이에 안이서도 그녀가 지금 소현정의 죄증을 녹화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제발 진정 좀 해요. 당신 이러는 거 이웃 주민들에게 민폐라고요!”
안이서는 소현정을 이 집에서 끌어내려고 했지만 백지효가 어느새 경찰에 신고했고 이를 눈치챈 그녀도 더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곧이어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말썽을 일으킨다는 제보를 받고 왔는데 여기가 맞습니까?”
경찰서가 이곳과 매우 가까웠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경찰에 소현정은 마냥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단에서 일어나 경찰 앞으로 걸어가며 안이서에게 삿대질하더니 먼저 고자질을 해댔다.
“경찰관님, 얘가 제 작은 딸이고 여긴 우리 큰딸 집인데 얘네 둘이 글쎄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더니 이 어미를 집 밖으로 내쫓으려 하지 뭐예요! 이거 진짜 서러워서 살 수가 없어요. 경찰관님이 대신 저 좀 도와주세요.”
이때 안이서는 계단에 서 있는 백지효를 힐긋 살펴보며 말했다.
“경찰관님, 저 사람 헛소리 들을 필요 없어요. 저한테 증거가 다 있어요!”
백지효가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방금 몰래 찍은 영상을 경찰에게 보여줬다.
경찰은 어리지만 똑 부러진 이 두 여자에 제법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했어요. 다만 저희랑 함께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해요.”
이어서 소현정에게도 똑같이 전했다.
“저희랑 함께 서로 가시죠.”
소현정도 바보가 아닌 이상 경찰이 그 영상으로 인해 안이서 쪽으로 더 기울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고 울면서 고개를 숙이는 척했다.
“이서야, 엄마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다만 안이서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경찰에게 말했다.
“서에 가서 조사해보시면 저희가 어떤 사이인지 바로 아실 겁니다.”
“네. 신고인이 절차대로 진행하자고 하니 반드시 저희와 함께 서로 가주셔야 합니다.”
경찰은 신고인의 태도에 따라 처사하는 것이니 소현정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고인 신분으로서 무조건 경찰서로 끌려가야만 했다.
경찰서 안에서 소현정은 좀전의 기고만장한 태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식하고 법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제멋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뭐 그건 그렇고 안이서와의 이번 원한도 또 한 번 가슴 깊이 새기는 그녀였다.
안이서와 백지효는 신고인 신분으로 경찰에 협조하여 각자 조사를 마쳤다. 안이서가 취조실에서 나왔을 때 마침 연준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 늦은 시간까지 가게 일 안 끝났어?”
그의 물음에 안이서는 머리를 번쩍 들고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는데 어느덧 12시가 다 돼갔다.
안이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취조실에서 따라 나온 경찰이 말했다.
“안이서 씨, 조사 기록에 문제없으면 여기 사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