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심은우는 빠르게 정장을 벗으면서 몸을 수그렸고 자신의 옷으로 구서희의 나신을 가려주었다.
구서희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윤지현, 당장 꺼져!”
심은우는 분노했다. 그녀는 윤지현의 안색이 심각할 정도로 창백해진 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깜짝 놀란 허지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윤지현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윤지현은 이를 악물고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정말 역겹네.”
윤지현은 허지호의 손을 밀어냈다. 제대로 설 수조차 없었지만 그녀는 홀로 걸으려고 애썼다.
심은우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전 윤지현의 눈빛은 마치 이곳에서 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심은우는 조금 당황했다.
허지호가 말했다.
“사... 윤 과장님께서 허리를 다치신 것 같습니다. 꽤 심각해 보였어요.”
심은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 전 본인이 힘껏 윤지현을 밀쳤다는 사실과 그녀의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을 떠올린 심은우는 하늘이 무너진 듯 엉엉 우는 구서희를 내버려두고 윤지현을 쫓아갔다.
“유진아, 나 빨리 끝내고 싶어. 정말이지... 심은우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윤지현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로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렇게 초라한 꼴로 기획팀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윤지현은 통증을 참으면서 회사를 떠났고 차를 타고 새집으로 향했다.
고유진은 윤지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직감하고는 곧바로 가방과 차 키를 챙겨서 빠르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 어디야?”
윤지현이 주소를 말했고 고유진이 대답했다.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
고유진은 윤지현이 선임한 이혼 변호사일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고유진은 윤지현을 잘 알고 있었다. 윤지현은 온화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고결하고 도도한 사람이었다. 심은우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차분하게 이혼 준비를 했다. 심지어 그녀 앞에서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큰 상처를 준 게 아니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심은우, 이 백 번 죽여도 시원찮을 놈!’
“응. 기다릴게.”
윤지현은 전화를 끊은 뒤 눈을 감고 가만히 몸을 기댔다.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과 주변의 빛을 가렸다. 끝없는 검은색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자꾸만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 됐어요?”
쥐 죽은 듯 고요하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지현은 눈을 번쩍 뜨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넓은 어깨와 길고 흰 목이 보였다. 검은색과 흰색이 대조되어 도도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위를 바라보니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윤지현은 그를 알아보고 작게 중얼댄 뒤 계속해 그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
조도현은 눈앞의 넋이 반쯤 나간 여자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그녀는 주차장에서부터 그를 쫓아와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고 그 뒤로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선점한 뒤 꼼짝하지 않았다.
조도현이 몸을 살짝 기울였다.
192cm의 큰 키를 가진 그는 마치 산처럼 몸집이 거대했다.
윤지현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막으려고 했다.
“뭐 하는...”
그러나 말을 이어가기도 전에 예쁜 손이 그녀의 팔 쪽에 닿았다. 그는 손등으로 윤지현의 몸을 바깥쪽으로 밀어낸 뒤 지문인식기에 손을 댔다.
“...”
윤지현은 그제야 혼란스럽던 상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엘리베이터는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지문인식기를 막고 있는 탓에 조도현도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나도 머쓱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5층에 도착한 뒤 윤지현은 조용히 손을 뻗어 지문인식기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조도현이 가려는 층을 알게 되었다.
꼭대기 층인 46층이었다.
윤지현은 어색하게 몸을 비켜섰다. 분위기가 아주 기묘했다.
이때 옆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이 들려왔고 이내 차가우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윤지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죠? 네? 쓰리 사이즈요? 윤지현 씨가 물었다고요...”
윤지현은 마치 녹슨 기계처럼 뻣뻣한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이때 그녀는 너무 머쓱해서 정신이 아득하고 시야가 흐릿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물어도 될까요?”
조도현의 표정은 아주 차분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윤지현은 구원받은 사람처럼 허리를 짚고 빠르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
고유진이 도착했을 때 윤지현은 안방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냉정해진 듯했지만 엎드려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해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고유진은 침대 옆에 쭈그려 앉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윤지현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사그라들어서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평온하게 전했고 고유진은 화를 냈다.
“넌 세민 그룹에서 일하고 있잖아. 그런데 벌써 그 내연녀를 회사로 데려왔다고? 심지어 대낮부터 그딴 짓을 해놓고 널 밀어? 정말 제정신이 아닌 놈이네. 이젠 숨기지도 않다니, 얼마나 뻔뻔하고 파렴치해?”
윤지현이 움직였다.
그녀는 몸을 뒤집을 생각이었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심하게 아팠다.
결국 윤지현은 몸을 뒤집는 걸 포기하고 계속 엎드려 있었다.
“넌 알잖아. 내가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 심은우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심은우를 버리는 거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란 걸. 그렇게 더러워진 남자에게 미련 따위 전혀 없어. 난 심은우를 쓰레기처럼 버릴 거야.”
고유진은 마음 아픈 표정을 하면서 윤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한 척해놓고 왜 이렇게 된 거야?”
“잠깐 충동적으로 굴어서 그래.”
윤지현은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보름 정도 남았어. 그 둘이 내 앞에서 벌거벗고 한대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거야.”
“그러다가 눈 썩으면 어떡해?”
“짐승들이 짝짓기하는 것뿐이잖아. 역겨우면 토하면 되지.”
“... 토하는 건 네 위에 안 좋아.”
고유진은 윤지현과 잠깐 있다가 그녀가 괜찮아 보이자 약국으로 가서 파스를 사와 윤지현의 허리에 붙여줬다.
밖은 이미 날이 저물었다.
심은우는 윤지현이 평소에 갈 법한 곳은 다 가보았고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전부 연락해 봤으며 심지어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찾아갔다.
그러나 윤지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유진에게 제일 처음 연락해 봤었는데 고유진은 모른다고 했다.
두 번째로 그녀에게 연락했을 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열 번째가 되어서야 윤지현이 말했다.
“받아. 네가 오후에 로펌을 떠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빌어먹을 자식, 이제야 급한가 보지?”
고유진은 베란다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심은우 씨, 지현이가 사라지는 편이 좋지 않아요? 앞으로는 당신과 그 뻔뻔한 내연녀를 방해할 사람이 없을 텐데 말이죠. 얼마나 좋아요?”
고유진의 말을 들은 심은우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 말했다.
“지현이한테 전화 받으라고 해요.”
“전화 못 받아요. 전 지현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아, 어쩌면 죽으려고 바다에 갔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바다에 가서 건져 보는 건 어때요?”
말을 마친 뒤 고유진은 전화를 끊었다.
고유진은 심은우를 안절부절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심은우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고유진의 전화가 다시 한번 울렸고 이때 윤지현이 나오며 말했다.
“내가 받을게.”
고유진은 윤지현에게 전화를 건넸고 윤지현은 전화를 받았다.
“유진이 그만 괴롭혀. 돌아갈 거야.”
전화 너머로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남자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허리 다친 건 괜찮아? 많이 아파?”
“하...”
윤지현은 별안간 실소를 터뜨렸다.
“가식 떠는 거 진짜 역겹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