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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윤지현은 구서희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맑고 차가운 눈동자로 구서희를 바라보았다. “네가 고귀하다고? 뭐가 고귀한데? 오목 게임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멍청해서? 아니면 내가 버린 쓰레기를 수거해가서 보물처럼 여기는 거? 그것도 아니면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주워가서 우쭐해하는 거? 그리고 우리 바닥의 애들이라니... 왜 나를 너랑 한데 묶으려고 하는 거야?” “제대로 하는 일 하나 없이 짐승처럼 엉덩이나 가볍게 놀리고 다니는 그런 구역질 나는 너희 판에 날 끼워 넣을 생각은 하지 마. 너랑 심은우는 그런 게 좋은가 본데 서로 방생하지 말고 그냥 둘이 평생 그러고 살아.” 평온하게 말했지만 엄청난 독설이었다. 구서희는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심지어 얼굴은 악귀처럼 사정없이 구겨졌다. 윤지현이 반쯤 말했는데 구서희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닥쳐! 그 입 내가 찢어버릴 거야! 당신 내가 죽여버릴 거야!” 구서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윤지현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윤지현은 태연하게 서 있다가 구서희가 자신의 앞에 다다랐을 때쯤 들고 있던 서류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구서희는 비틀대면서 바닥에 쓰러졌고 코피까지 흘렸다. “인수인계 끝났어. 하루빨리 세민 그룹을 말아먹길 바랄게.” 말을 마친 뒤 윤지현은 밖으로 나갔다. “당신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아아악!” 구서희는 코를 움켜쥐고 미친 사람처럼 세민 그룹이 떠나가라 소리를 꽥꽥 질렀다. 기획팀 사람들은 감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윤지현이 사무실 안에서 나와 조금 걸은 뒤에야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들 그녀를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했다. 3팀 팀장 주효민은 압박에 굴하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윤지현의 개인 물품들을 챙겨서 나왔다. 그녀는 쓰레기통 안에 있던 걸 주워서 깨끗하게 닦은 뒤 박스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윤 과장님, 제가 1층까지 도와드릴게요.” 주효민의 모습에 윤지현은 마음이 따뜻해져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비록 지금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지만 빛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요.” 윤지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획팀 사람들은 윤지현을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배웅했고 주효민은 윤지현을 도와 그녀의 물건을 1층까지 들어주었다. 떠나기 전 윤지현은 주효민에게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전해주세요. 자기 일 열심히 하고 구서희 씨 심기는 건드리지 말라고요. 당분간은 구서희 씨가 죽치고 있게 놔두세요. 재미가 없으면 알아서 떠날 거예요. 그리고 만약 구서희 씨 때문에 기획팀에 문제가 생긴다면 즉시 대표님에게 알리세요. 구서희 씨가 여러분께 누명을 씌울 틈을 주지 말아요. 몇천억씩 되는 프로젝트들을 여러분들이 감당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대표님도 구서희 씨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면 방법을 생각해서 처리할 거예요.” 주효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꼭 전달할게요.” 윤지현은 주효민을 한 번 안았다. “자주 연락할게요.” 차를 타고 세민 그룹에서 나올 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몸 위로 툭툭 떨어지는 것이 왠지 서글펐다. 이제 열흘 남았다. 곧 끝날 것이다. ... 구서희는 윤지현이 떠난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고자질했다. 당시 구서희의 오빠 구형준도 자리에 있었다. 구서희의 코가 빨간 걸 본 그는 조금 당황했다. “왜 그래?” 구서희는 그들 중간에 앉아서 슬프게 울었다. “지현 언니 말이야. 내가 커피도 타 주고 의자도 양보했는데 글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날 욕하기 시작하더라니까. 막 나한테 뻔뻔하다면서 말이야. 그리고 나랑 은우 오빠를... 짐승이라고 욕했어.” “나는 일에 관해 좀 물어볼 생각이었거든. 그래서 반박도 못 했어. 심지어 욕만 한 게 아니라 날 때리기까지 했어. 인수인계하려고 가져온 서류로 내 뺨을 때리더니 바닥에 눕혀놓고 때리기까지 했어.” ... 심은우는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형준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버럭 화를 냈다. “... 그 여자 미친 거 아냐?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은우 씨, 이 일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심은우가 대답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요즘 걔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요.” ‘겨우 이거야?’ 구서희는 심은우가 자신의 편을 들면서 윤지현을 불러와 그녀에게 따져 물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바람대로 되지 않자 구서희는 더욱 화가 났다. “누가 대신 사과해달래? 나는 그 사람이 직접 찾아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기를 원한다고! 그리고 내가 맞은 것만큼 돌려줄 거야!” 심은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건 안 돼.” 구형준이 언짢아했다. “안 된다고요? 그 여자는 내 동생을 이 꼴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 여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면 우리 구씨 가문에서 법적 책임을 물을 거예요.” 심은우는 손을 거두어들인 뒤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 꼭 그래야만 한다면 안타깝게도 저희 협상은 결렬될 것 같네요. 그리고 법률 분쟁까지 가야 하겠네요.” 구씨 가문의 두 남매는 경악했다. 구형준이 말했다. “그... 그 여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심은우는 몸을 뒤로 기울이면서 긍정했다. “제 여자니까요. 제 여자는 아무도 건들일 수 없어요.” 구서희는 너무 심통이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심은우는 그녀와 있을 때 매우 즐거워했고 집에도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윤지현과의 감정도 식었고 더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을 텐데 왜 그녀를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까? 자기보다 윤지현이 심은우에게 더욱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 구서희는 너무 화가 나서 윤지현을 산 채로 토막 내고 싶었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심은우가 앞으로 그녀를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결국 구서희는 성질을 죽이고 말을 바꿨다. “됐어, 오빠. 지현 언니는 나랑 은우 오빠가 친해서 화가 난 걸 거야. 나도 언니가 진짜 내 앞에서 무릎 꿇기를 바란 건 아니야. 그냥 말만 해본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구형준은 어이가 없었다. 구서희는 구씨 가문의 넷째 딸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스스로를 낮춰가며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경쟁하면서 심은우의 애정을 다투는 것일까?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우 오빠, 내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나한테 보상해 줘야 해.” 구서희는 불쌍한 척하며 애교를 부렸다. 심은우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리면서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당연하지.” 구형준은 열받은 채로 그곳을 떠났다. ... 윤지현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윤아의 연락을 받았다. “자기야, 내일 오후 경윤의 반형서 대표님이 조도현 씨랑 골프를 친대. 내가 반 대표님한테 친구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내일 꼭 잘 보이도록 해.” “자기가 최고야. 뽀뽀해 줄게.” “어머나, 닭살 돋게 왜 이래? 그러면 수요일에 봐.” “그래.” 좋은 소식 때문에 기뻤던 윤지현은 저녁을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서 늦은 밤 소화하기 위해 운동용 방으로 향했다. 20분쯤 걸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심은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오늘 또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돌아오지 않는 건 이미 익숙했지만 이 시각에 전화를 하니 조금 의아했다. 윤지현은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고 이내 전화 너머에서 남자와 여자의 야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우 오빠, 오빠 정말 대단하다.” ... 윤지현은 원래도 속이 더부룩했는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구역질이 나서 허리를 숙이고 토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도 바닥에 툭 떨어져서 스크린이 깨졌다. 윤지현은 정신없이 속을 게워 냈다. 심지어 담즙까지 쏟아냈는데도 계속 구역질이 났다. 그녀는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윤지현은 괴로움 때문에 밤새 잠들지 못할 줄 알았다. 솔직히 너무 고통스러워서 심장을 뽑아버리고 싶을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렇지 않았다. 윤지현은 눈을 뜬 채로 자신의 느리게, 하지만 힘 있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시간은 일분일초 흘렀고 어느샌가 눈을 감은 윤지현은 순식간에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 윤지현이 깨어났을 때는 이제 막 동이 튼 상태였다. 윤지현은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을 정리한 뒤 아침을 먹고 새 휴대전화를 샀다. 오후에 그녀는 약속대로 리암 골프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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