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이를 건네받은 박태성은 곧바로 할아버지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마치 미션을 완수한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가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박민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고래고래 외쳤다. “이놈아! 거기 서. 방금 결혼했다는 자식이 아내를 두고 혼자 가버릴 작정인 거야?” 박태성은 창문을 내리고 할아버지의 말에는 대꾸조차 안 하더니 온채원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잘 들어. 우린 몰래 결혼한 사이니까 앞으로 밖에서 찍소리하지 마. 괜히 내 체면만 깎이니까.” 말을 마치고 나서 액셀을 밟고 배기가스만 남친 채 떠나갔다. 게다가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온채원은 대답할 타이밍마저 놓쳤다. 박민철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온채원이 서둘러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박민철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에게 괜찮냐고 묻고 싶었지만 뻘쭘한 분위기를 헛기침으로 무마시키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채원아, 너도 봤지? 손자가 이 모양이라 도통 좋아할 수가 없어. 게다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설마 정떨어져서 이혼하려는 건 아니지?” 온채원은 진지한 얼굴로 호언장담했다. “그럴 리가! 아무리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잘 보살필게요. 우리 동네에서는 한 번 결혼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생각하지 함부로 이혼을 언급하지는 않아요.” 만약 동종 업계에서 감히 대마왕 박태성을 쓸모없는 취급하는 용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일지 사뭇 궁금한 순간이다. 박민철은 온채원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며 마치 어린 소녀를 늑대 소굴로 유인한 악당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집에 돌아가자마자 손자 녀석이 사는 별장을 몰래 손자며느리의 명의로 변경해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운전기사에게 온채원을 박태성의 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젊은이들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며 정을 붙인 다음 나중에 다시 본가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반면, 그는 접수증을 숨기기 위해 얼른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손자 녀석이 이혼하고 싶어도 옴짝달싹 못할 것이다. ... 오아시스 빌리지는 박태성이 주로 지내는 곳이다. 별장 치고 검소한 구역은 다소 평범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해당 지역은 오래된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특수한 장소라서 돈만 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오아시스 빌리지에 산다는 자체가 곧 신분을 상징하는 셈이다. 박민철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깜빡하고 설명을 생략해서 온채원을 데려다준 운전기사는 본인이 박씨 가문의 사모님을 모시고 온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오아시스 빌리지 입구에 멈춰서서 짐이 한 가득 되는 그녀는 외면한 채 쌩하니 떠나갔다. 온채원은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제1구역을 찾아갔다. 이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고, 안쪽에 있는 3층짜리 작은 건물을 발견했다. 얼핏 보기에 마을에서 제일 잘사는 부잣집 건물과 흡사한 느낌이 들었고, 심지어 시골 졸부 집보다 더 수수한 인테리어를 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박민철도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닌 듯싶었다. 사실 결혼을 결심하기 전까지만 해도 재벌 집에 시집가면 갭 차이가 너무 클까 봐 걱정이 많았다. 정원은 하도 넓어서 앞으로 채소를 키우기에 적합할 것 같았다. 온채원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내 정원을 지나 건물 앞에 서서 박민철이 준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쪽 발을 내딛는 순간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박태성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었다. 외투는 옆에 걸쳐 놓았고,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옷깃 사이로 남자다운 목젖이 드러났다. 눈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눈꼬리의 작은 점 하나가 따라서 움직였고, 일거수일투족은 여유로우면서 귀티가 흘러넘쳤다. 온채원은 마치 조각상처럼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넋을 잃고 말았다. 한편, 그녀는 큼직한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짐을 가득 쑤셔 넣은 탓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대학교에 갈 때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챙겨왔다. 그리고 왼손에는 분홍색 양동이를, 오른손에는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골동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그나마 예쁘장한 얼굴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온채원은 바짝 긴장했지만 그래도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성 씨, 안녕하세요. 저는 온채원이라고 해요.” 별장에 발을 들인 여자를 보자 박태성은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늑대처럼 살벌한 기운을 은근히 풍겼다. 이내 낮게 가라앉은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장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