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모든 게 연기에 불과했으니 부엌에 들어간 후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박태성은 문에 기대어 온채원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채원은 평소 가정식 백반을 즐겨 했다.
그녀는 갈비를 깨끗이 씻어 데친 후 생강과 후추로 잡내를 잡았다.
그리고 능숙하게 생선을 손질하더니 소금, 맛술, 파에 절여 찜기에 올려놓았다.
야채도 매우 꼼꼼하게 세 번씩 씻고선 감자와 함께 다듬었다.
어릴 때 자주 굶은 탓에 음식에 대한 존경심은 일반인들과 달랐기에 요리에만 초집중하여 문 옆에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었다.
박태성은 눈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아담한 뒷모습을 보며 그동안 자신의 행동이 선을 넘은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의도를 잘 숨기네?’
요리를 끝낸 온채원은 음식을 테이블로 옮기다가 하마터면 박태성에게 부딪힐뻔했다.
그제야 박태성의 존재를 알아차린 그녀는 아무리 부부 연기에 집중한들 꼬박 한 시간 동안 말없이 곁을 지키는 박태성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온채원은 접시를 건네주며 박태성에게 가져가라고 눈치 줬다.
갈비탕, 생선찜, 마늘쫑무침 ,감자볶음 등등...
집밥으로 가득 찬 테이블을 보니 왠지 모를 따뜻함과 푸근함이 느껴졌다.
온채원은 부드러우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밥으로 간단하게 준비해 봤어요. 입에 맞으신지 한번 드셔보세요.”
박민철은 한 젓가락 맛보고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우리 집 셰프가 한 것보다 훨씬 맛있어. 태성이한테 너 같은 아내가 있는 건 정말 축복이야. 안 그러니, 태성아?”
박태성의 이름이 호명되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행여나 말실수로 들통나지는 않을까 온채원은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한 상황에 박태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채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온채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들은 박민철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혼을 운운하던 박태성이 이런 답을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체면을 세워준 건지, 두 사람의 관계가 호전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다 좋은 일이니 마음이 놓였다.
식사를 마친 후 박민철은 TV를 보고 싶다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박민철의 곁에 앉으려던 온채원은 그의 시선이 박태성에게 향한 걸 무심코 보고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민철은 두 사람이 잘 사는 걸 간절히 원했기에 그들은 또다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박태성에게 걸어간 온채원은 용기 내 그의 손을 잡고선 옆에 앉혔다.
“할아버지, 우리 얼른 TV 봐요.”
아니나 다를까 박민철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온채원은 주체할 수 없는 긴장으로 박태성을 잡은 손에 땀이 흠뻑 맺혀 있었다.
박태성이 얼마나 극혐할지 눈에 보였기에 연기가 들통날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태성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왼쪽에는 박태성, 오른쪽에는 박민철. 온채원은 그들 사이에 앉았다.
오늘이 지나면 집을 나가야 하는데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될 박민철이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나중에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해도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제가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 아시죠?”
그 말을 들은 박태성은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재벌집 출신은 일생을 살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부를 떠는 사람을 수없이 만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민철은 턱수염이 떨릴 정도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채원이한테 내가 어떻게 화를 내겠니.”
박민철은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선택해 즐겁게 시청했다.
그와 달리 온채원은 좀처럼 TV에 집중하지 못했고 박태성과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긴장이 되어 허리를 세웠다.
박태성도 마음이 딴 곳에 간 건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다시 한번 사람을 졸리게 하는 향기를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