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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박태성은 싸늘한 표정으로 온채원을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네가 제멋대로 약속한 거잖아.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태성 씨 할아버지잖아요.” “상관없어.” “태성 씨.” 박태성은 잔뜩 예민해진 온채원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다. 온채원은 입술을 깨물며 애원했다. “할아버지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심장도 안 좋아요.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내일... 내일부터 집안일 더 많이 시켜도 괜찮으니까 오늘만 도와줘요.” 박민철은 오랫동안 그녀를 지지해 준 사람이자 편지까지 써주며 돌봐준 유일한 어른이다. 어려서부터 가진 게 적은 탓에 온채원은 어떤 것이든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어 했다. 박태성은 온채원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차갑고 무자비한 미소를 지었다.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하는 건 가능한데 조건이 있어. 오늘 이후로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온채원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태성 씨 돌봐주기로 할아버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 박태성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주머니가 알아서 다 해주실 거야. 별장은 다른 도우미들이 지금껏 잘 정리했고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알고 있어서 편한 나날을 보냈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정원에는 2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키운 난초도 있었다고.” 박태성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듣기 거북한 말을 쏟아냈다. 그의 말대로 박태성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거니와 온채원의 등장이 되레 박태성에게 짐이 되었다. 지난 며칠간의 행동을 통해 온채원도 그가 자신을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박태성은 무시하는 듯한 눈빛으로 온채원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건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잖아. 집 한 채 사줄 테니까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주먹을 불끈 쥔 채 고민에 빠진 온채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나갈게요.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집 한 채로 부족한 거야? 조건이 뭔데?” 박태성의 눈빛에는 조롱이 담겨있었다. ‘드디어 속물의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나한테서 뭘 빼내는 게 어려우니까 떠나기 전에 큰거라도 하나 받으려는 건가?’ 박태성의 비꼬는 말에도 불구하고 온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대신 앞으로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하면 저한테 미리 연락해 줘요. 정말 싫겠지만 그날만큼은 사이좋은 부부인 척 연기해 줘요. 할아버지가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응?” “이 조건에 동의한다면 집을 구하고 바로 나갈게요.” 박태성은 그녀가 박민철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박민철을 이용해 이 관계를 이어가려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의도를 파악하려 온채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참이나 관찰했지만 온채원의 눈에는 그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다. 박태성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온채원은 행여나 그가 말을 바꿀까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최대한 빨리 이 집에서 나갈게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온채원의 태도에 박태성은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러든 말든 온채원은 박민철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에 얘기가 끝나자마자 장 보러 나갔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그 누구보다 막막한 건 온채원이다. 은혜를 갚으려고 시작한 결혼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관계에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박태성이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만큼 온채원도 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슬픈 감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 점심 11시. 박민철이 찾아왔다. 온채원은 황급히 달려 나가 반갑게 박민철을 맞이했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뭘 이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녀는 자연스레 박민철의 손에 들린 물건을 건네받았다. 박민철의 뒤에 서 있는 운전기사도 양손 가득 쇼핑백 열 개를 들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박민철과 함께한 베테랑 운전기사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나타난 온채원을 보며 박민철의 가난한 친척이나 새로 온 도우미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대체 이 아가씨는 누구지?’ 동시에 이른 아침부터 부랴부랴 창고를 뒤지던 박민철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손이 모자라지 않았다면 창고 전체를 옮겨올 기세였다. 순간 지난번에 온채원을 별장 입구에 내려주고 떠났던 기억이 생각나 매우 당황했다. 박민철은 운전기사가 당황하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전봇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박태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잔뜩 신이 난 채로 온채원에게 선물을 보여줬다. “채원아, 이건 제비집인데 여자한테 좋대.” “혹시 몰라 백년삼도 챙겨왔어. 일단 갖고 있어.” “그리고 이건 경매에 산 옥팔찌야.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 한번 껴봐.” “이거는...” 온채원은 눈앞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몸 둘 바를 몰랐다. “할아버지, 이렇게 안 챙겨주셔도 돼요.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성 씨도 잘해주고 요즘 너무 행복해요.” 박태성은 고자질하는 게 아니라 되레 잘 살고 있다며 안심시키는 온채원을 보니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박민철은 다정하게 온채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네가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자마자 얼어붙은 온채원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온채원처럼 고된 생활에 익숙해진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고마움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낀다. 어쩌면 박태성과 잘 살기를 바라는 박민철의 기대를 저버려서 죄책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온채원은 고개를 숙인 채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요.” 울먹이는 온채원을 보니 박민철은 가슴이 미어졌다. 고된 삶을 살아온 아이한테 사랑도 없는 결혼을 강요했으니 박민철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고 늘 빚진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이 결혼은 온채원이 자진해서 한 것이지만, 자신의 손자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더욱 걱정이 밀려왔다. 늘 고생할까 봐 걱정하는 그와 달리 온채원은 박민철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온채원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도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브라운색의 목도리가 있었다. “별건 아니고 제가 직접 짠 목도리예요. 날도 추워지는데 따뜻하게 옷도 많이 챙겨입으세요.” 박민철은 목도리를 건네받자마자 활짝 웃으며 목에 둘렀다. 그 시각 온채원은 상자에서 또 뭔가를 꺼냈다. “아이들이 할아버지한테 쓴 편지예요.” “이건 연우가 잡은 잠자리고, 이건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예요.” 비록 온채원이 준비한 선물 중에 값비싼 물건은 없었지만 박민철은 그 마음을 알아서인지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줄곧 예민한 모습을 유지하던 온채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날카로운 가시를 가둔 듯 순하고 온화하게 변했다. 박태성이 아닌 온채원이야말로 그의 친손주 같았다. 선물을 주고받은 후 온채원은 점심을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박태성의 곁을 지나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태성 씨, 약속 잊지 마요.” 박태성은 오늘 하루 동안 사이좋은 부부인 척하기로 온채원과 약속했기에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뒤를 따랐다. 박민철은 두 사람이 함께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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