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온채원은 변태라도 본 것처럼 극혐하는 눈빛으로 박태성을 바라봤다.
그녀와 달리 박태성의 표정은 싸늘했다.
“걱정하지 마. 너 같은 꼬맹이한테는 관심이 없으니까.”
온채원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잠만 자는 거죠?”
“응.”
“그럼 중간에 베개 하나 놓아도 돼요?”
“그래.”
“난초를 배상하는 대신 정원에 다른걸 키우는건요?”
박태성은 짜증이 나는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음대로 해.”
금방이라도 화낼 것 같은 박태성의 모습에 온채원은 마지못해 걸음을 멈추고 재빠르게 동의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부부끼리 함께 자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끝없는 자기암시를 했다.
난초를 배상하는 데 쓰일 수천만 원은 시골 학교 몇 년간 운영비에 버금가는 큰 금액이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한 후 빠르게 박태성의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은 매우 부드러웠고 박태성 몸에서 나는 특유의 우디향이 느껴졌다.
온채원은 자신을 극도로 싫어하는 박태성이 갑자기 함께 자려고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온채원은 침대에 누워 박태성의 잘생긴 옆모습과 눈가에 있는 작은 점을 힐끔 쳐다봤다.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마치 사람을 유혹하는 듯 매혹적이었다.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 온채원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직 열이 안 내렸나?’
감기약을 먹은 탓인지 잔뜩 긴장하던 온채원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시각 박태성의 눈빛에는 가소로움이 담겨있었다. 고작 몇천만 원 때문에 침대에 기어오른 그녀가 그저 속물처럼 느껴져 기가 찼다.
그러다가 우연히 잠든 온채원을 발견했다.
‘잠들었어? 아니, 내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잔다는 게 말이 돼?’
박태성은 쉴 때 아무도 옆에 두지 않는 스타일이다. 물론 그의 옆에서 쉬길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의 친구는 독사 옆에서 자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는데, 언제든지 덮칠듯한 두려움에 한시도 편한 적이 없다고 했다.
박태성은 잠든 온채원을 바라보며 그녀의 평온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긴장감이 풀리는지 곧이어 박태성도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한편, 박민철은 전화한 후에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손자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순진한 손자며느리가 손해를 볼까 봐 걱정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이 되어 끝내 조용히 슬쩍 가보기로 했다.
몰래 오아시르 빌리지에 도착한 박민철은 조용하고 텅 빈 별장을 보고선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 박태성의 방문을 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니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헉.’
박민철은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네.’
겉으로는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박태성은 지금껏 겪은 여러 사건 때문에 뼛속까지 차가워진 지 오래다.
사람에 대한 믿음조차 밑바닥을 찍은 상태라 박민철은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위협하며 장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박민철은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순수한 온채원이라면 박태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여는 게 꽤 오래 걸릴 거란 예상과 달리 그들은 너무도 빨랐다.
박민철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뒤로 거두었다.
그러고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문을 닫고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방문이 닫히는 동시에 박태성이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잠든 온채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잠들었던 두 시간은 박태성이 몇 년 이래 가장 개운하고 편하게 잔 순간이었다.
온채원이 잠버릇이 안 좋아 이리저리 움직였음에도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박태성은 마음이 차분해진 원인을 찾았다. 다름 아닌 온채원 몸에서 나는 향기였다.
바디워시인지 세제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원인을 찾았으니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곧바로 온채원을 밀어냈다.
세상모르고 잠자던 온채원은 박태성에게 밀려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온채원은 비몽사몽 눈을 뜨고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태성을 바라봤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박태성의 싸늘한 말 한마디였다.
“나가.”
‘왜 갑자기 또 성질이야. 소리는 왜 질러. 진짜 딱 한 대만 때리면 소원이 없겠다.’
옆에서 자라며 제멋대로 제안할 땐 언제고 뜬금없이 화를 내는 박태성이 너무 어이없었다.
...
한 침대에서 자고 나면 서로 가까워져 사이좋게 지낼 거라는 온채원의 기대는 얼마 못 가 산산조각이 났다.
예상과 달리 박태성은 전보다 훨씬 온채원을 싫어했다.
점점 더 난처하게 만드는 건 물론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바람에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설령 할 일을 다 했다 하더라도 쉬는 꼴조차 보고 싶지 않은지 끊임없이 일거리를 던져주었다.
어제는 별장에 있는 모든 커튼을 교체하라며 자정까지 손세탁을 시켰고 오늘은 콩을 카펫에 쏟고선 한알 한알씩 치우도록 명령했다.
박태성이 일부러 이런 행동을 했다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다.
온채원은 참아야 한다며 스스로 설득했다.
박민철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하니 박태성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이겨내리라 다짐했다.
‘화내면 안 돼. 참아야지.’
‘절대 욱해서 박태성을 때리면 안 돼.’
박태성에게 꼬투리조차 잡히고 싶지 않았던 온채원은 안성자에게 전화를 걸어 별장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수첩에 메모했다.
우선 청소는 매일 해야 하고, 박태성의 침구는 3일에 한 번씩 갈아줘야 한다. 카펫은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맡겨야 하며 그가 주로 입는 정장, 셔츠, 넥타이 등등은 드라이클리닝, 캐시미어 소재의 옷은 무조건 손빨래를 해야 한다. 박태성이 싫어하는 음식은 고수, 여주, 족발, 간...
‘애도 아니고 왜 이렇게 편식하는 거야.’
온채원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전부 메모하며 박태성이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이 악물고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했다.
박태성은 싫어하는 사람을 처리할 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스타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온채원을 대할 땐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괴롭히며 이도 저도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서 스스로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절대 순순히 물러설 온채원이 아니다.
박민철이 베풀어준 은혜에 비하면 이깟 서러움 따윈 아무것도 아니니까.
며칠간의 경험으로 온채원은 박태성이 굉장히 밉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밉상은 그녀는 몹시나 싫어한다.
...
그렇게 둘은 주말까지 티격태격했다.
오늘은 박민철이 점심을 먹으러 오는 날이기에 온채원은 박태성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처럼 지내는 건 전혀 대수롭지 않았지만 박민철에게 둘 사람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온채원은 아침을 차리고 박태성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박민철이 올 때까지 자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열 시까지 일어나지 않으면 직접 깨우려고 했다.
다행히 9시쯤에 내려왔는데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난 이틀간 성질이 더욱 난폭해졌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박태성은 온채원은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웃음이 많기로 유명한 온채원도 박태성을 마주할 때면 표정이 굳어졌다.
“태성 씨, 아침 먹어요.”
테이블에는 박태성을 위한 샌드위치와 우유가 놓였고 온채원 앞에는 얼큰한 만둣국이 있었다.
전에 박태성이 온채원이 만든 음식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말한 이후로 그녀는 안성자의 말대로 그가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을 준비했다.
온채원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유를 마시고 있는 박태성을 바라봤다.
“태성 씨, 할아버지께서 점심 드시러 오신다는데 우리... 오늘 하루만 사이좋은 부부인 척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