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이정호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크게 웃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넌 내 여자 친구잖아. 그런데 누가 너랑 결혼한다는 거야? 내가 너랑 결혼해 준다니까. 잘 듣지 못한 거면 다시 한번 얘기해줄게. 너랑 결혼해 주겠다고. 너 로또 당첨된 거라니까?”
이정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새 맥주캔을 바닥에서 주워 캔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고리 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피식 웃더니 비틀거리면서 송연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송연아의 손을 잡더니 같잖다는 듯 입을 비죽이다가 맥주캔의 캔 고리를 그녀의 중지에 끼워주었다.
“자, 이제 믿지?”
송연아는 자기 손가락에 끼워진 캔 고리를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가 이정호에게 얼마나 싸구려처럼 보였으면 한낱 캔 고리로 그녀를 얽매려는 걸까?
송연아는 이정호의 손을 뿌리친 뒤 캔 고리를 빼서 이정호에게 던졌다.
“그건 서우 씨에게 줘. 난 그거랑 어울리지 않거든.”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갔다.
“내일 9시 구청 앞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잘났으면 오지 말든가!”
이정호는 송연아의 등에 대고 고함을 질렀지만 송연아는 멈추지 않고 걸어서 룸 밖으로 나갔다.
“연아 씨!”
허기태는 송연아를 따라서 달려 나왔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호가 지금 예민한 상태예요. 그...”
그는 사실 이정호를 두둔할 셈이었다. 그러나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정호가 쓰레기 같은 짓을 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꼭 온서우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보여주겠어. 온서우가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해도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널렸다고!”
이정호의 포효 소리가 룸 밖까지 전해졌다. 송연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저것 봐요. 이정호는 그냥 온서우 씨에게 화가 난 것뿐이지, 진심으로 저랑 결혼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정호는 사실 서우 씨랑 어울리지 않아요.”
“그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죠. 하지만 만약 절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제 의견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네요. 전 이미 정호랑 헤어졌어요.”
허기태는 송연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송연아의 눈동자에서 단호함을 보았다.
이번엔 진심으로 이별한 듯했다.
별장으로 돌아온 뒤 송연아는 배가 꼬르륵거렸다. 그녀는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다.
아까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이 있어서 들렀는데 결국 라면 하나만 사 들고 왔다.
주방은 텅 비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작은 냄비 하나가 있었다. 라면을 끓이고 보니 그릇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냄비째로 라면을 먹어야 했다.
이때 서강호가 그녀에게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고기국수 사진이었다.
[소고기는 어제 찐 거예요. 아침에 국수를 삶아서 소고기 몇 점을 잘라 넣었고 쪽파도 썰어 넣어서 금방 만들었어요.]
그가 보낸 사진과 문자를 본 송연아는 피식 웃었다.
서강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금방 약혼자라는 역할에 몰입했다. 그리고 그는 혼잣말하는 걸 좋아했다.
송연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자신이 먹고 있던 라면 사진을 찍어서 그에게 보냈다.
서강호는 금방 답장을 보냈다.
[내가 만든 고기국수, 먹어 보고 싶지 않아요?]
송연아는 손뼉을 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가 조금 과한가 싶어서 살짝 후회했다.
서강호가 문자를 보냈다.
[돌아가서 해줄게요.]
그의 문자를 본 송연아는 심장이 어딘가에 부딪친 것처럼 조금 시큰거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간 송연아는 먼저 입원 병동으로 가서 환자들 상태를 체크했다. 산부인과에 도착하자마자 수간호사인 유진희가 그녀를 끌고 위층 VIP 병실로 향했다.
“원장님이 선생님에게 환자를 한 명 배치해 주셨어요.”
“저요?”
“네. 꼭 선생님이어야 한대요.”
VIP 병실 구역에 도착한 송연아는 복도에 나와 있는 이정호를 단번에 발견했다.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날 선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병동은 금연 구역이었고 오가는 의사나 간호사들도 있었지만 감히 그에게 담배를 끄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간호사는 송연아에게 병실을 알려준 뒤 떠났다.
송연아는 걸어가서 이정호가 있는 쪽의 병실 앞에 섰다.
병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온서우가 보였다.
어젯밤 온서우는 팔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했다.
수간호사는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서 병원에 올 필요도 없이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자살이라는 행위가 사람들을 겁먹게 만든 건지 한밤중에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 꽤 큰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든 이정호는 송연아를 발견하고는 마치 화풀이할 상대를 찾은 것처럼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힘껏 밟아서 껐다.
“책임감 없는 인간 말종 때문에 자살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럴 가치가 있어? 그럴 가치가 있냐고?”
송연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너도 같은 여자잖아.”
송연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가치가 없지. 적어도 나는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나 자신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야.”
이정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이정호가 발광하는 걸 무시하고 송연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서우가 쓰는 VIP 병실은 병원에서 가장 호화로운 병실로 내부가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며져 있었다.
온서우는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서 링거를 맞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송연아가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송연아는 다가가서 온서우의 상처를 확인한 뒤 청진기를 댔다.
“조금 전 검사 결과를 보니까 상처가 깊지는 않아요. 아이도 무사하고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은요?”
온서우는 흐느끼며 물었다.
“누구요?”
“정호요.”
“밖에 있어요.”
“왜 절 보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걸까요?”
송연아는 침묵했다. 두 사람은 정말 이상했다.
왜 뭐든 그녀에게 묻는단 말인가?
“어젯밤에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정호는 지금까지 절 만나려고 하지 않아요. 이번 일로 제게 크게 실망한 것 같던데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에요. 이미 완전히 마음을 접었거든요.”
“온서우 씨, 잠깐만요. 제가 밖으로 나가서 정호를 불러올 테니까 직접 얘기하세요.”
“아뇨. 전 연아 씨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온서우는 고개를 돌려 송연아를 바라보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주 도도했다.
“예전에 전 정호랑 가짜 결혼을 해서 사람들을 속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진심으로 정호와 결혼하고 싶어졌어요.”
송연아는 혀를 찼다.
어장 관리를 하면 언제든 빈자리를 메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송연아는 이정호에게 어장 관리를 당했고 이정호는 온서우에게 어장 관리를 당했다.
“그런데 그걸 왜 저랑 얘기하시는 거죠?”
송연아는 웃긴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물었다.
“송연아 씨가 알아뒀으면 해서요. 더는 정호에게 매달리지 말아요.”
“제가 매달렸다고요?”
“송연아 씨가 정호를 사랑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정호가 사랑하는 건 저예요. 제가 정호와 만나겠다고 한다면 송연아 씨 자리는 없을 거예요.”
온서우는 그렇게 얘기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송연아 씨가 8년간 정호와 만난 걸 생각해서 약간의 보상은 해줄 수 있어요.”
보상?
꽤 새로운 멘트였다.
송연아는 흰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미소 띤 얼굴로 온서우를 바라보았다.
“사실 어제 정호가 저에게 프러포즈를 했거든요.”
송연아의 말에 온서우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제가 거기서 고개를 끄덕였으면 바로 이씨 가문의 사모님이 됐겠죠.”
“정호는 저만을 사랑해요.”
“그게 뭐 어때서요? 지난 8년간 정호와 만난 사람은 저예요. 서우 씨는 다른 남자랑 만났고요.”
“그건...”
“그러니까 서우 씨가 어떻게 보상해야 내가 정호 같은 훌륭한 남자를 포기할지 잘 고민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