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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송연아는 캐리어를 끌고 별장을 나섰다. 북적대는 도로를 바라보는 순간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집이라고 생각하고 무려 8년 동안 생활한 곳이지 않은가? 비록 헤어지고 따로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발붙일 곳을 찾을 시간이 미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지? 막막하던 찰나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이내 가방에서 꺼내 확인해보니 서강호가 보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은 시틀랜드인데 오늘 날씨가 좋네요. 다만 일이 좀 바빠서 아침은 빵 한 조각으로 때웠어요. 한식 파라서 그런지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점심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못 먹고 이따가 저녁에 약속이 있는데 어쩌면 술에 취할 정도로 많이 마실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접대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꽤 긴 내용이었고, 마치 업무 보고라도 하는 듯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어리둥절한 송연아는 그나마 마지막 한 마디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참, 별빛 정원 8호 별장이 우리 집이에요. 언제든지 이사 와도 되니까 앞으로 함께 지낼 곳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데 알아볼 수도 있어요.” 별빛 정원이라니? 같은 단지에 사는 이웃일 줄이야! 심지어 멀지도 않았다. 이내 8호 별장 앞에 도착해서 서강호가 보낸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방 구조는 동일했지만 인테리어가 전혀 달랐다. 그녀가 사는 별장은 전체적으로 포근한 느낌이며 벽에는 각종 장식품, 그리고 가구도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오로지 흑백 두 가지 컬러에 내부는 텅 비었고 거실에는 흔한 소파조차 없었다. 여기서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의혹을 뒤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갔지만 역시나 휑했다. 방은 총 3개였고, 침대는 안방에만 있다. 물론 침대를 제외한 가구는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별장에 살지 않거나 자주 오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테리어를 최소화하고 가전이나 가구를 들이지 않은 듯싶었다. 송연아는 아침 내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짐 정리를 마쳤고, 아침밥도 못 먹고 공복으로 출근했다. 조슬기가 찐빵 한 개와 우유 반 컵을 나눠주며 은근슬쩍 자랑까지 끼워 넣었다. “남편이 어제저녁에 반죽해서 아침 댓바람부터 제가 좋아하는 야채 찐빵을 만들었더라고요.” 송연아는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 잘 지켜야 하겠는데요? 아니면 제가 빼앗아 갈 거예요.” 이에 조슬기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을걸요? 왜냐하면 남편은 저만 사랑하거든요.” 송연아는 온종일 기분이 좋았고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지난 8년 동안 일방적인 희생의 대가로 근근이 이어온 사랑에 어느새 본인도 지쳐갔다. 그러나 훌훌 털어버리고 나니 삶이란 원래 간단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후에 이정호가 문자를 보냈다. [책은 안 챙길 거야? 그냥 다 처분해?] 그녀는 내용을 확인하고 답장하는 대신 카톡을 지우고 연락처를 차단했다. 사실 두고 간 물건은 꽤 많았다. 8년의 흔적을 어찌 하루아침에 정리하겠는가? 그중에서 책은 제일 볼품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서강호가 그녀의 문자에 답장했다. [별장에 제 짐을 옮겼어요.] [환영해요.] 비록 한 마디에 불과했지만 송연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했다. 이내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강호 씨 침대에서 자도 돼요?] 바로 답장할 거라는 기대는 안 했기에 휴대폰을 끄고 지하철 타러 갔다. 지하철에 타고 나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대를 하나 더 사겠다고 덧붙이려는 순간 상대방의 답장을 받게 되었다. [네.] 이를 보자 얼굴이 별안간 화끈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시차 때문에 그가 있는 곳은 새벽 3시일 텐데 아직도 안 잤단 말인가? 지하철역에서 나온 송연아는 마트에 들렀다 갈 생각이었다. 서강호의 집에 마련해야 할 물건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입구에 다다르자 임지헌이 연락이 왔다. “연아 씨, 살려줘요.” 송연아는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죠?” “칼에 찔렸어요.” “네?” 허기태의 주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업이 끝났다. 정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종업원이 한창 정리하고 있었다. 이내 그녀를 발견하자 손가락으로 안쪽 룸을 가리켰다.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테이블은 부서졌고 의자는 널브러져 있으며 바닥에는 술병 잔해로 가득했다. 안쪽에 있는 소파에 기대어 앉은 이정호는 안색이 어두웠고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송연아는 힐긋 쳐다보고는 뒤돌아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연아 씨, 드디어 왔네요. 제발 도와줘요.” 임지헌이 서둘러 뛰어나와 그녀를 붙잡았다. “저 진짜 칼에 찔렸어요.” 그러고 나서 자기 팔을 가리켰는데 다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때, 허기태가 다가와 임지헌을 밀어내고 구급상자를 건네주었다. “저놈이 병원에도 안 가고 다른 사람이 만지게도 못해서 연아 씨한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미 헤어진 마당에 죽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죠?” 송연아는 황당한 듯 말했다. “전 당연히 연아 씨 편이에요. 다만 헤어져도 친구는 할 수 있잖아요.” “이정호랑 친구로 지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연아 씨, 제 체면을 봐서라도 한 번 도와주세요.” 송연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마지못해 구급상자를 받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허기태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서우가 현민수의 아이를 가졌는데 정작 애 아빠란 놈은 책임지기 싫어할 뿐더러 낙태까지 강요했죠. 정호가 대신 화풀이 해주려고 현민수를 불러냈다가 대뜸 주먹다짐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정호의 상대는 아니지만 나중에 서우가 도착해서 현민수의 편을 들어주며 정호한테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바람에 일단락이 났고, 그 틈을 타서 현민수가 술병으로 정호의 머리를 내리쳤죠.” 송연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우 씨는 어디 있어요?” “현민수를 따라갔어요.” “재밌네요.” 허기태는 한숨을 쉬었다. “이따가 절대로 현민수와 온서우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마세요. 괜히 또 발작할까 봐 걱정되네요.” 송연아는 묵묵부답하더니 구급상자를 들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숨을 헐떡이는 이정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발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번쩍 들었고,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들어 와?” 송연아는 그를 무시하고 구급상자에서 면봉을 꺼내 소독약을 발라 상처부터 닦아주려고 했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네 도움받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정호가 고래고래 외쳤다. 무모하고 고집쟁이에 막무가내인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송연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내보내며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로 감싸주었다. “상처가 꽤 깊으니까 병원에 데려가서 꿰매야 해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허기태와 임지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정호에게 덥석 붙잡혔다. “날 차단했어?” 송연아는 손을 빼냈다. “이제 헤어졌으니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않겠어? 너도 덜 신경 쓰일 테고.” “당장 다시 추가해!” “얻어맞더니 머리가 잘못됐나? 병원에 얼른 가 봐야 하겠는데?” 말을 마치고 나서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 “서우가 약속을 어겼어. 나랑 결혼하기 싫다고 하니까 너랑 할게.” 송연아는 우뚝 멈춰서더니 고개를 돌려 이정호를 바라보았다. 의기양양한 표정은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싶었다. “되지도 않는 자비는 집어치워. 이미 결혼하기로 한 사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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