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30분 뒤, 정은지는 학교에 도착했다.
정은지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곧이어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잖은 학생들이 정은지를 보자 눈빛이 싹 변하며 불쾌감을 드러냈고, 심지어 몇몇은 다 들리게다 투덜거렸다.
“쟤는 왜 왔대?”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애가 무슨 낯짝으로 우리 경제금융학과에 남아있으려는 걸까?”
경제금융학과는 전부 우수한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정은지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재벌 집 딸은 과 전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존재로 지목당하며 주변 학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이런 소리를 듣고도 정은지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무례한 행동들이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평판을 받게 된 게 모두 한아진 ‘덕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한아진 때문에 정은지는 많은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졌었고, 그로 인해 동기들은 정은지에게 악감정을 품게 되었다.
다행히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던 정은지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정은지는 곧바로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필기를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노트북을 펼치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노트가 엉망진창으로 적혀 있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딴 노트로 어떻게 수업 준비를 해? 망했네! 이 수업은 패스해야 하나?’
정은지는 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좌우를 둘러보던 그녀는 문득 멀지 않은 구석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소녀가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표정이 밝아지더니 덩달아 두 눈도 초롱초롱해졌다.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저 애는 임지현일 거야. 한때 우리 과에서 성적이 가장 좋았던 친구였지! 게다가 내성적이고 착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었지... 그래서 ‘책벌레’라고 불릴 정도였었지...’
하지만 정은지는 곧바로 한아진이 예전에 임지현의 착하고 순수한 모습은 모두 겉으로만 내비친 가식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한아진은 한술 더 뜨며 실제로는 어떤 대기업 회장에게 몰래 ‘스폰’받고 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그 소문은 임지현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성적이 급락하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한동안 휴학까지 했었다.
한아진은 임지현이 휴학한 것도 죄책감 때문일 것이라며 조롱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한아진은 단지 임지현을 질투해 찌라시를 만들어 퍼뜨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당시 정은지는 한아진을 너무 믿었었기에 한아진이 만들어낸 거짓된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고 임지현을 조롱하는 데 동참했었다.
이 생각이 미치자, 정은지는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임지현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현아, 안녕?”
예상치 못하게도 임지현은 정은지를 보자 마치 무서운 사람을 본 듯 뒤로 살짝 물러났다.
“정은지? 무슨 일이야?”
정은지는 급히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한테 해코지할 생각은 없어! 그냥 오랜만에 수업에 나왔는데, 생각보다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가능하다면 노트를 좀 빌려줄 수 있어?”
‘노트를 빌려달라고?’
임지현은 흠칫 놀랐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걸로 유명한 정은지가 나한테 노트를 빌리겠다고?’
“그래... 빌려줄게.”
임지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노트를 정은지에게 건넸다.
바로 그때, 한아진이 교실로 들어오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러더니 곧바로 웃음 띤 얼굴을 장착하고 다가왔다.
“은지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이건 또 뭐야?”
“노트 빌리는 중이었어.”
정은지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한아진은 순간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은지, 너 뭐야? 진지하게 공부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 웃기네.’
한아진은 속마음을 숨기고 여전히 친절한 척하며 말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노트가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내가 다 필기해 놨거든.”
정은지는 시큰둥하게 웃었다.
“됐어. 그냥 지현이 노트를 빌려서 공부할래. 필기를 깔끔하게 했더라고... 그리고 이미 빌려주기로 했어. 그냥 이걸로 할게.”
사실 정은지는 한아진이 예전에 빌려줬던 노트가 항상 중요한 부분은 빠진 노트였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교수님이 강조한 부분은 하나도 빠짐없어 빠져 있었다.
이 일로 인해 정은지는 수업 시간에 여러 번 지적을 받았지만, 한아진은 항상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벌려준 노트를 꼼꼼히 보지 않았다며 정은지를 탓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정은지는 또다시 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지혜롭게 임지현의 노트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한아진은 자리로 돌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정은지가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예전엔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정은지는 임지현의 노트를 재빨리 옮겨적은 후, 노트를 돌려주며 잊지 않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지현아,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이 수업은 정말 재수강이 답이었을 거야.”
임지현은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아... 아니야. 얼마든지 빌려줄게...”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고, 정은지는 자리로 돌아갔다.
교수도 곧 들어오셨다.
출석을 부른 후, 교수는 강의를 시작했다.
비록 노트를 베껴 적었지만, 정은지는 대학 3년 동안 제대로 수업을 듣지 않았기에 여전히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교수님이 예상대로 정은지를 지목하여 질문을 하셨다.
“정은지 학생, 이 문제의 정답이 무엇인가요?”
“그... 그게...”
정은지는 순간 당황하여 머릿속이 텅 비었고 멍해졌다. 몇 가지 선택지를 보았지만, 어떤 것이 정답인지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다.
교수는 정은지가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지난 수업에서 분명히 다뤘는데, 왜 수업을 듣지 않았나요?”
그러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은지는 정말 난감했다. 역시 ‘벼락치기 공부법’은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동안 놓친 부분을 모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 정은지는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 한아진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은지야, 우리 같이 갈래?”
정은지는 함께 가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아니. 난 할 일이 좀 남아있어... 너 먼저 가.”
말을 마치고 정은지는 마침 교실 앞을 지나가는 임지현을 보고는 급히 가방을 챙겨 그녀를 따라갔다.
“지현아, 잠깐만!”
임지현은 정은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은지는 임지현이 당황한 모습에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미안해, 지현아. 내가 전에 너무 많은 수업에 빠져서 그러는데... 요점 좀 알려줄 수 있을까?”
“그건...”
임지현은 다소 난감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소극적이고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했다. 게다가 항상 자신과 정은지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은지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아, 제발 부탁할게.”
임지현은 그 모습을 보고 거절하기 어려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중에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줄게.”
“정말 고마워! 지현아, 넌 정말 착한 천사야! 내가 밥 사줄게!”
정은지는 환하게 웃으며 임지현을 끌고 신나게 학식을 먹으러 갔다.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아진은 순간 마음속에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정은지, 너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갑자기 외톨이 임지현과 그렇게 가까워질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