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황희숙은 결국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꼭 갚겠다고 고개 숙여 말했다.
물론 그녀도 앞서 한소유처럼 방우혁의 말을 그저 허세로 받아들였다.
‘대하 제일의 갑부라고?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야 가능한 건데?’
일반 서민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세계였다.
방우혁은 돈을 건네주고는 곧바로 집을 나섰고 목적지는 뒷산 채소밭이었다.
하지만 채소밭 입구에 웬 고급 리무진이 떡하니 서 있었다.
“또 누구야 이번엔...”
방우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가갔다.
차에서 내린 건 옷차림만 봐도 상류층임이 분명한 부부였고 그 뒤엔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누구신데 여기 계세요? 혹시... 채소 훔치러 온 건 아니겠죠?”
방우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유미의 부모입니다. 귀하께서 며칠 전 우리 딸을 구해주신 은인이시죠?”
지동휘가 웃으며 말했다.
지유미가 말하던 것처럼 게으른 듯하지만 범상치 않은 청년이라는 묘사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방우혁이 바로 그런 모습인 사람인 것 같았다.
“지유미라고요?”
방우혁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우리는 은혜에 보답하러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리 딸의 목숨을 구해주신 건 우리 지씨 가문으로선 잊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부인 안미령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봤자 결국은 돈 좀 쥐여주는 거겠죠? 저는 돈엔 별 관심 없어요. 그만 돌아가시죠.”
방우혁이 손을 툭 털며 말하자 지동산 부부는 서로를 바라봤다.
‘이 청년은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가 돈에 관심이 없단 말인가?’
“그럼... 혹시 귀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저희 지씨 가문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지동휘가 다시 물었다.
그는 지씨 가문의 가훈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인물이었고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걸 말하는 건가요? 요수 내단입니다. 아마 들어본 적도 없겠죠.”
방우혁은 한숨을 쉬더니 몸을 돌려 채소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수... 내단?”
지동휘는 잠시 눈썹을 찌푸렸고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긴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안미령이 작게 말했다.
“그거 말인데... 몇 년 전 아버님 생신 때 북쪽에서 온 도사가 선물한 상자 기억나요? 그 안에 든 게 뭔 내단이었는데...”
“그게 확실해? 잘못 기억한 건 아니지?”
지동휘가 말할 틈도 없이 방우혁이 두 발짝 만에 안미령 앞으로 다가왔다.
속도가 너무 빨라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무심코 허리춤에 손을 뻗을 정도였다.
“정말 요수 내단이었어요? 확실해요?” 방우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는 그냥 내단이란 말만 기억해요. 정확한 건 저도 잘...”
안미령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좋아요. 지금 바로 당신들 집으로 가서 확인합시다.”
방우혁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러자 지동휘 부부는 또 한 번 눈을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심하게 구는 듯하더니 요수 내단이란 말 한마디에 이렇게 급변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감사한 일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바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동휘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리무진이 떠난 뒤 채소밭 옆 나무 그늘 속에서 한 남자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어느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목표 인물이 지씨 가문 사람들과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
40분 뒤, 방우혁은 지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지가의 대저택은 바닷가를 끼고 있어 경치는 상당히 좋았지만 규모 자체는 한씨 가문에 비해선 조금 작았다.
하지만 방우혁에겐 풍경 따위는 중요치 않았고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말했다.
“어디 있어요. 그 내단.”
5분 후, 거실 소파에 앉아 하인의 차를 마시던 방우혁 앞에 지동휘가 손에 나무 상자를 들고 내려왔다.
사실 지동휘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멀리서부터 그 기운이 느껴졌다.
‘정말 요수 내단이 맞네!’
방우혁의 눈빛이 반짝였고 그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내단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동휘가 상자를 열자 주먹 반 크기의 어두운 갈색 구체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흐르는 기운만 봐도 이건 2급 요수의 내단이었고 겉모습으로 보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듯했다.
“그 도사가 이걸 가루로 빻아서 약으로 쓰라고 했어요. 체질 강화에 좋다고... 근데 뭔가 좀 이상해서 결국 먹진 않았죠.”
지동휘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이걸 갈아버렸으면 진짜 죄악 중 죄악이었죠.”
방우혁은 내단을 집어 들었다.
비록 품질이 높진 않지만 지금처럼 갈증 난 상태의 그에겐 감지덕지했다.
“이걸로 은혜는 갚은 걸로 할게요.”
방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우린 사실 이걸 쓰지도 않을걸요...”
지동휘가 대답도 채 끝내기 전에 방우혁은 바로 그 내단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헐...”
지동휘와 안미령은 놀라서 말 그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 좋아.”
방우혁이 길게 숨을 내쉬자 내단이 몸속에서 서서히 풀리며 진한 영기가 퍼져나가고 단전에 흡수되어 갔다.
그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지동휘 부부를 보노라니 방우혁은 한가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세상에 요수는 거의 사라졌지만 내단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몰라서 보관만 하는 가문들이 아직 많을지도 몰라. 만약 백 개쯤만 모을 수 있다면...’
방우혁은 이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가주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
방우혁은 지가를 떠나 다시 도시 빈민촌 쪽으로 돌아왔다.
두 골목만 지나면 집인데 골목 입구에 가방을 멘 여학생 한 명이 담장 앞에 서 있었다.
등과 가방 실루엣을 보자마자 방우혁은 그녀가 유슬기라는 걸 알아챘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7시 10분이었다.
‘아줌마는 분명 6시 반쯤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슬기는 왜 아직도 저기 서 있는 걸까?’
방우혁은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깜짝 놀라며 뒤돌아보던 유슬기는 방우혁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 방우혁은 단번에 알아챘다.
슬기의 왼쪽 뺨 위엔 붉게 부어오른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고 눈가도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방금까지 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우혁 오빠... 여기서 뭐 해?”
유슬기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아마도 뺨을 가리려는 듯했다.
“일 좀 보고 왔지. 근데 너는? 학교 연습 끝난 지 꽤 됐을 텐데 왜 아직도 집에 안 들어가고 서 있어?”
방우혁이 물었다.
“그, 그게... 끝나고 친구들이랑 조금 놀다가 이제야 왔어...”
유슬기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 뭐 하냐? 아줌마는 네가 6시 반쯤 도착할 줄 알고 기다리고 계실 텐데.”
“...저, 그게...”
유슬기는 손가락을 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방우혁은 그녀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말해. 누가 너 뺨 때린 거야?”
유슬기는 온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일 없어요...”
“걱정하지 마. 아줌마한테는 말 안 할게. 대신 말해주면 내가 네 얼굴에 남은 자국 지워줄 수 있어.”
방우혁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유슬기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고 끝내 참지 못하고 방우혁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흐느끼며 끊어지는 말들 사이로 방우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아냈다.
연습 중, 고3 선배 한 명이 계속 실수를 반복해 연습이 지체됐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선배는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고 웃고 떠들며 거들먹거렸다고 했다.
그때 시간은 이미 좀 늦었기에 유슬기는 일찍 마치고 집에 가고 싶어서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한마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지금 나한테 뭐라 했어? 네 말뜻은... 나 때문에 우리의 시간이 다 낭비되었다고?”
그러자 여자 선배는 굳어진 얼굴로 유슬기를 그대로 뺨을 후려쳤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빨리 오늘 연습을 끝내고 싶어서 그랬죠. 시간도 이미 늦었어요...”
유슬기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일찍 끝내고 싶다면 먼저 꺼지면 돼! 앞으로 연습하러 오지 않아도 돼.”
여자 선배는 유슬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유슬기는 살짝 무서웠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선배님이 좀 열심히 연습에 대해줬으면 해서...”
유슬기의 말이 떨어지지도 전에 여자 선배는 바로 그녀한테 뺨을 날렸다.
“당장 꺼져. 앞으로 내 눈에 얼씬거리지도 마.”
여자 선배는 유슬기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 어디서 날 교육하려고 드는 거야? 가뜩이나 요 며칠에 짜증 나서 죽겠는데... 고작 고1 주제에 어디서 난리야. 죽고 싶어!”
여자 선배는 줄곧 욕설을 퍼부었다.
후에 옆에 있던 다른 선배가 여자 선배를 말리면서 유슬기보고 빨리 가라고 했다.
“네가 전에 그 여자 선배의 미움을 산 적이 있어?”
그러자 유슬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선배는 고등학교 3학년 2반이었고 난 절대 전에 그 선배를 만나본 적도 없어...”
‘3학년 2반? 그게 우리 반이잖아...’
“혹시 이름이 뭔지 알아?”
방우혁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건 몰라.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 선배를 아림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
유슬기가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아림? 성이 뭐래?”
방우혁이 계속해서 묻자 유슬기는 기억을 더듬으며 선생님이 출석체크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아마도 성이 강씨... 같아.”
‘강아림? 그 여자였구나!’
방우혁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