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이혜인은 1층 응접실로 들어왔다.
경도준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고 이혜인은 그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녀는 서지민이 경찰서장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저도 그 여자가 누군지 몰라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도 못 봤고요.”
이혜진은 진심으로 억울하기만 했다.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는데 왜 도와줬어? 잘 생각하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일은 내가 직접 조사에 나설 거니까 상황의 심각성을 잘 깨닫기를 바래.”
경찰서장으로서 심문에 익숙한 서지민은 하는 말 마디마디가 협박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그건 그 여자가 총을 들고 저를 협박해서 그랬어요.”
이혜인은 눈빛을 피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총을 들고 널 협박했던 거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섰을 때 구해 달라는 비명을 지르는 게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이 아니었을까? 일부러 다친 척하면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겠지?”
서지민은 썩소를 지었다.
“경고하는데 거짓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그 여자하고 한패라 여길 수밖에 없어. 방금 그 여자가 호텔을 빠져나갈 때 수류탄을 던져 일곱 사람들을 다치게 했거든. 만일 그 여자를 잡지 못하면...”
“한패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누군지 모른단 말이에요.”
얼굴이 창백해진 이혜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럼 솔직하게 다 털어놔. 이게 마지막 기회일 거야.”
어떨 때 보면 서지민은 여린 여인을 가냘프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게... 그 여자가 제 사적인 비밀로 저를 협박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왔던 거예요.”
“비밀이라니? 무슨 비밀? 그 여자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의외의 답을 들은 서지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경도준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가... 제가 낙태를 했었다는 비밀이었어요.”
지금에 와서 이혜인은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서지민은 경도준한테 시선을 재빨리 돌렸고 경도준도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있었다.
“진짜예요. 제가 이런 것까지 다 밝혔는데 뭐가 더 할 말이 남았겠어요.”
상대 쪽에서 별 반응이 없자 이혜인은 초조해졌다.
“참! 엘리베이터 안에 저 말고도 다른 한 남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남자도 그 여자한테 협박을 당한 거예요.”
서지민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진우남이 협박을 당했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서지민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3층에 있을 때 그 여자가 그 남자한테 접근했었거든요. 처음에 그 남자가 상대를 하지 않았었어요. 제가 그때 가까이에 있어서 비록 음악 소리가 크게 들리긴 했지만 그 여자가 진씨 가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어렴풋이 들렸었어요.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요. 아무튼 그 남자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그 여자의 손목을 잡고 누구냐며 엄청 사납게 캐묻고 있더라고요.”
순간 경도준하고 서지민은 말문이 막혔다.
숨을 크게 내쉬고 난 이혜인은 겁에 질려 말하는 속도마저 빨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하나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어요. 나중에는 그 남자가 선뜻 그 여자를 도와주겠다고 했고요. 그 뒤로는...”
이혜인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경도준한테 말을 건넸다.
“그 뒤의 일은 그쪽도 다 알고 있을 거잖아요.”
“저는 피가 잔뜩 묻은 채로 달려오는 그 여자를 보면서 잔뜩 놀란 채로 엘리베이터에 끌려간 거예요. 하도 숨기고 싶어 하는 일로 저를 협박하길래 저도 다른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일로 진우남을 협박한 거지? 진씨네 가문에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걸까?”
서지민은 심각한 표정이 역력했다.
“절대 남한테 들켜서는 안 될 일인 것 같은데 그 여자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진씨네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걸까...”
서지민은 이혜인을 힐끗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혜인이 낙태를 했다는 걸 무슨 수로 알게 된 거지?”
진씨네의 일도 이혜인이 낙태했다는 일도 전부 사적인 일이라 외부인이 알 만한 일들이 아닐 텐데...
“내가 볼 땐 진우남하고 이혜인하고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일 거야.”
서지민은 결론을 내렸다.
“맞아요. 절 아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가면을 쓰고 있는데 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혜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사이인 듯해 보였다.
그럼 이혜인한테 익숙한 걸로 보아 아마 그 여자는 진우남하고도 익숙한 사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당시 파티장에서 진우남을 협박한 걸 보면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진우남을 발견한 게 틀림없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진우남이나 진씨네 가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지인이 있어?”
”고하진! 고하진은 진우빈의 약혼녀야. 고하진이 열한두 살 때 진씨네 집안하고 혼약을 맺었었어.”
이혜인이 답하기도 전에 서지민은 문득 그 사실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마침 사촌 여동생한테서 그 얘기를 전해들었던 것이다.
진우빈한테 은근 마음이 있었던 여동생은 고하진을 듣기 거북한 말들로 소개를 했었다.
“고하진?”
경도준은 이혜진한테 눈빛을 고정했다.
“아는 사람이야?”
고하진이 진우남하고 이혜인이 다 아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알죠. 당연히 알죠. 고씨 집안 큰 아가씨예요. 생김새가...”
이혜인은 심호흡을 하더니 내키지 않는 듯 말을 털어놓았다.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녔어요.”
고하진은 경국지색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나라와 백성한테 재앙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절세 미녀였다.
“경국지색이라!”
서지민은 점점 다른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형이 안간힘을 쓰고 잡으려는 여자가 경국지색의 외모를 지녔다니!
이것보다 더 흥분할 만한 일이 있으려나?
경도준은 서지민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서지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경국지색이라잖아.”
“그런데 고하진은 멍청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어요. 반 친구였는데 고하진은 얼마나 머리가 둔한 건지 매 과목의 시험 성적이 30점을 넘은 적이 없었다니까요. 심지어 한 자릿수일 때도 있었고요. 대학 입시 성적은 총 56점이었어요. 저희 학교 역대 최저 기록을 깬 애예요. 아무튼 고하진은 그냥 멍청한 꽃병에 불과해요. 고씨네 집안에서 고하진한테 재산 하나 물려주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었고요. 그래서 진우빈이 파혼하겠다면서 난리도 아니에요.”
이혜인은 서지민의 반응을 보며 살짝 화가 치밀었다.
얼굴이 예쁘면 뭐 해?
머리가 그 모양인데?
“그럼 고하진은 아니겠네.”
괜히 김칫국을 마셨네!
서지민은 어리둥절해졌다.
“글쎄.”
경도준은 그윽한 눈동자에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명문 집안들 자식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가문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후계자일수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또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력을 감출 때가 있는 것이다.
고하진이 어쩌면 그런 자가 아닐까?
방금 진우빈이 파혼하려 한다는 이혜인의 얘기를 들어보니 혹시 고하진이나 고씨네 집안의 목적이 바로 이걸 수도 있을 거라는 의심이 들고 있었다.
“형, 고시 성적이 56점인 여자가 멍청해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떻게 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겠어?”
서지민은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진우남을 경찰서 오게 만들어.”
이 이야기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경도준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