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송유리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또다시 진동했다.
황이진의 프로필 사진이 채팅창 맨 위로 올라왔고 메시지 함에는 이미 몇 개의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고인성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건 괜찮은데, 절대 마음은 주지 마. 진심으로 빠지면 안 돼.]
[솔직히 난 고인성이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싶어. 내가 이 집으로 들어온 지 꽤 됐는데, 단 한 번도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니까...]
[잘생기기만 하면 뭐해? 남자구실을 못 하면 아무짝에 소용없어.]
송유리는 순간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오늘 일을 설명할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설명할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아니야. 그래도 해명은 해야겠어.’
[저 진짜 우연히 퇴근하다가 마주친 거예요. 일부러 약속 잡은 거 절대 아니에요. 고 대표님과 진짜 안 친해요.]
곧바로 황이진에게서 답장이 왔다.
[에이, 그게 안 친한 거야? 고 대표님이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데, 이유도 없이 그런 곳에 갔을 리가 없어. 분명히 네가 보고 싶어서 따라간 걸 거야. 나한테는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송유리는 여전히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물었다.
[이진 언니, 진짜 화난 거 아니죠?]
[내가 왜 화를 내? 고 대표님이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고 대표님과 결혼할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난 그냥 고씨 가문에서 애완동물 취급받는 거야. 그냥 돈만 주면 나는 이 생활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어.]
[언젠가 돈 좀 모이면, 그냥 평범한 사람 만나서 결혼할 거야.]
송유리는 그 답장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고 대표님과 이진 언니가 그런 관계였다고? 아니... 언니가 이렇게 쿨할 줄이야...’
황이진은 이어서 진심 어린 충고를 덧붙였다.
[어쨌든 내 말 꼭 기억해. 그 사람 돈 많으니까 돈은 얼마든지 받아도 돼. 대신 절대 마음까지 주지는 마. 결혼도 하지 않을 여자를 집에 데려다 두는 걸 보면 좋은 남자일 리가 없거든. 넌 착해서 더 조심해야 해.]
송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언니, 고마워요.]
‘절대 고인성에게 마음을 주지 말자!’
송유리는 황이진의 조언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황이진은 경험 많고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선배였다. 그녀의 말은 송유리가 헛된 길로 빠지지 않게 해 줄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한편, 송유리의 몰락을 기대하며 황이진에게 사진을 보낸 손서우는 다음 날 송유리가 아무 일 없이 출근한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분명히 사진을 보냈는데 왜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송유리가 평소처럼 멀쩡하게 출근해 일하는 모습을 보니 손서우의 속이 부글거렸다.
‘왜 좋은 일은 다 저 신입한테만 생기는 거야?’
...
다음 날.
송유리는 막 서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복도에서 윤지훈과 고인성을 마주쳤다.
이 두 사람은 등장부터 남달랐다.
뒤따르는 경호원들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매니저는 몸을 낮추며 공손하게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윤지훈은 특유의 수다스러운 목소리로 고인성을 물고 늘어졌다.
“예전엔 그렇게 불러도 안 오더니, 요즘은 왜 이렇게 잘 나오시나? 내가 그동안 애걸복걸했을 땐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이제는 전화 한 통으로도 출동하시네?”
고인성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윤지훈은 그의 무반응이 더 재밌다는 듯,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들을 이어갔다.
“요즘 고 대표님 출석률 너무 높은 거 아니냐는 그 말입니다!”
그러다 고인성의 서늘한 눈빛이 날아오자, 윤지훈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히려 만족스러워 보였다.
‘저 사람... 혼나는 걸 즐기나 봐.’
송유리는 멀리서 두 사람을 보자마자 잽싸게 방향을 틀어 복도로 숨어버렸다.
고인성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만남도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지금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여겼다.
그날 밤의 일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면, 황이진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한편, 매니저는 그들을 룸 앞까지 안내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윤지훈은 문 앞에 서서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번에 고 대표님께 서빙했던 그 직원, 이번에도 불러줄 수 있을까요?”
윤지훈은 고인성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쉽게 나온 건 다 그 여직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여직원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정말 그 여자가 그렇게 매력 있는 거야? 인성이 형이 이렇게 흔들릴 정도라고?’
매니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첨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대부분의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잠시 짬이 난 직원들만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이곳은 바 테이블과도 가까워 매니저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찾아오는 곳이었다.
매니저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물었다.
“송유리 어디 있어? 여기 있니?”
모든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쉽게 알아볼 수 없었기에 매니저는 항상 이렇게 이름을 불러가며 필요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서빙하러 나갔을 거예요.”
매니저는 다시 물었다.
“언제 돌아온댔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매니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남겼다.
“송유리가 돌아오면 바로 1번 룸으로 보내.”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나자마자 휴게실은 다시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송유리가 뭐가 좋다고 맨날 1번 룸에서 찾는 거야?”
“아직 어려서 순진한 척 잘하잖아. 하하하.”
“그거 알아? 지난번에 송유리가 1번 룸에 들어갔다가 팁으로 몇십만 원 받았다던데?”
“그야 고 대표님이니까, 손이 크겠지...”
“진짜 이해할 수 없어. 그날 나도 그 룸에 들어가서 서빙했거든? 송유리는 딱히 한 것도 없었어. 그냥 술 몇 잔 따른 게 다인데, 왜 걔만 그렇게 많은 팁을 받은 거냐고... 난 하루 종일 땀 흘리며 일하고, 대머리 할아버지들한테 치근덕거림이나 당하면서 간신히 5만 원 받는 신세인데...”
직원들은 하나같이 송유리를 향한 질투와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매니저가 송유리를 지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마침 손서우도 휴게실에 있었다. 매니저의 지시와 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 잠시 망설이던 손서우가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해. 이번엔 내가 1번 룸에 갈게.”
“뭐라고요? 하지만 매니저님이 송유리를 보내라고 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한 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손서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다들 마스크 쓰고 있는데, 그쪽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다 기억하겠어? 이럴 때는 용감한 사람이 돈을 버는 거야. 나는 갈 수 있어. 너희는 어때?”
모두 침묵했다. 확실히 그들은 손서우만큼의 배짱이 없었다.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손서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가는 거로 할게. 아무도 매니저님께 말하지 마. 대신 돌아오면 팁 조금씩 나눠 줄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팁을 받을 수 있다니, 남은 사람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이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손서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1번 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송유리는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 서빙을 하다가, 겨우 잠깐의 여유를 얻어 휴게실로 돌아왔다.
마스크를 벗고 의자에 앉아 한숨 돌리려던 순간, 휴게실에 있던 몇몇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시선은 묘하게 낯설었고 송유리는 금세 불편해졌다.
참다못한 그녀는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세요?”
그제야 직원들은 자신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음을 깨달은 듯, 서둘러 눈길을 피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맞아. 그냥 잠깐 멍때린 거야.”
“신경 쓰지 마.”
송유리는 여전히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
‘뭐지? 뭔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