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넌 너무 더러워
성시연은 선뜻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안 났다. 지금 뭐라고 해명하든 다 안 믿어줄 테니까...
서로를 바라보는 10초라는 시간이 꼭 마치 한 세기처럼 느껴졌다.
강찬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노도, 질문도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시선을 거둔 채 차에 올라탔다.
그 순간 성시연의 머릿속에 어서 쫓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1초라도 늦으면 더는 저 남자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이건 아마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빠른 속도일지도 모른다. 진현수가 걸쳐준 외투도 달리면서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예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의 눈가에 스친 실망한 기색도 더더욱 발견할 리가 없었다.
“찬우 씨...”
그녀는 울먹이며 차창 너머로 안에 있는 남자를 들여다봤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마지막 동아줄을 잡듯이 그를 간절하게 쳐다봤다.
강찬우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차에 시동을 걸지도 않은 채 이렇게 냉랭한 분위기만 이어갔다.
‘그래, 이건 차에 타라는 뜻이야.’
그녀는 과감하게 생각을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그녀는 절대 물러설 수가 없었다.
성시연이 차에 탄 후 강찬우도 시동을 걸고 강씨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그녀에게 눈길 한번 안 주는 남자였다. 이건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냉랭함과 소외감이 담긴 강찬우의 눈빛은 애초에 그의 엄마가 타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시연을 바라보던 그 눈빛과 너무 흡사했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증오가 섞여 있었지만 이번엔 아주 차분했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 정도로 너무 차분했다.
성시연은 질식할 것 같은 이 분위기를 애써 깨보려고 노력했다.
“찬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떤 거?”
그가 문득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핸들을 잡고 있던 손에 저도 몰래 힘이 들어갔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도 돼? 해명할 필요 없어. 다만... 네가 너무 더러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이것뿐이야.”
성시연은 주먹을 꽉 쥔 채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하면 가슴을 찌를 듯한 그 고통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은 아무 사이가 아니니 그녀의 해명 따위 필요 없다. 어젯밤에 진현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더더욱 안 믿을 테고... 이런 것들은 그에게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성시연은 여전히 속이 안 내켰던지 빨개진 눈시울로 그를 바라봤다.
“그럼 왜 진씨 저택에 나타난 건데요?”
강찬우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공기 속에 또다시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강씨 저택에 돌아온 후 강찬우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성시연이 따라서 들어올 때 그는 한창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 옷장의 옷들을 캐리어에 죄다 내던지며 일 초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여기 있는 자체가 그에겐 지옥이었던 걸까?
성시연은 그래도 자신이 떠나기 전까지 그와 화목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3년 만에 겨우 돌아온 이 남자는 또다시 매정하게 짐을 싸고 있다. 아무래도 더는 이 집에 머물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 이별하는 것도 미련이 덜 남을 것 같기는 했다.
“찬우 씨...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가 애원 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찬우는 그녀를 째려보더니 드디어 짙은 눈동자에 분노가 들끓었다.
“꺼져!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성시연은 고집스럽게 제자리에 서 있을 뿐 전혀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
“출장 가는 거라면 내가 대신 짐 싸줄게요.”
그녀는 말하면서 몸을 쪼그리고 앉아 그가 대충 내던진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때 강찬우가 그녀의 손목을 확 잡더니 매정하게 뿌리쳤다.
“꺼져! X발, 진짜 역겹다 성시연! 너도 결국 다를 바 없네!”
그녀는 바닥에 넘어진 채 손목이 이따금 시큰거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절망의 기색이 두 눈동자를 뒤덮었다. 메마른 목은 더 이상 한 글자도 내뱉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녀는 떠나야 할 사람은 본인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