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사실 강다인은 스스로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고작 김지우의 꼼수에 불과했고, 강별을 학교로 부른 이상 기껏해야 성적이 취소될 뿐이다.
하지만 이석훈이 성적을 물어보는 순간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강다인이 대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강다인,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이에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교무실에 다녀와서 다시 연락할게요.”
그리고 전화를 끊은 후 곧바로 교무실로 찾아갔다.
안에 들어서자 강별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강별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강다인, 시험을 잘 보려고 어떻게 커닝할 수 있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어차피 그녀를 의심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내 단호한 눈빛으로 반박했다.
“커닝한 적 없어.”
사실도 아닌데 왜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누구나 뻔한 사실인데 아직도 우기는 거야? 평소 성적과 집에서 하는 행동만 봐도 하루아침에 일취월장한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커닝할 동기도 충분하잖아. 얼른 잘못을 인정하고 학교에서 경고 처분이라도 받도록 해.”
강다인은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런 말로 내가 커닝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강별은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오빠도 안중에 없는 거냐?”
강별이 손찌검이라도 할 기세에 나유빈은 서둘러 막아섰다.
“말로 잘 타일러요.”
강별은 씩씩거리며 나유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다인이 오빠들한테 삐져서 커닝하게 된 거예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반성문을 쓰고 전교생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징계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나유빈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이번 기회에 다인이가 개과천선했으면 좋겠지만...”
이제 곧 졸업을 앞둔 고3 수험생이 징계받는다는 건 그리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강다인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가뜩이나 차가웠던 마음이 이제는 온기를 잃어갈 지경이었다.
오로지 본인들의 추측으로 커닝했다고 확신하고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
“강다인, 너 때문에 우리 집안 체면이 이게 뭐야? 이렇게 고약한 사람은 처음 봐. 내 여동생이라고 입 밖에 꺼내기도 부끄럽네.”
“나도 강씨 가문의 여동생이 되고 싶지 않았거든?”
강다인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싸늘한 눈빛은 냉기를 품어냈다.
이제는 오빠들에게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뭐? 다시 말해 봐.”
강별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무 몰아붙이지 마세요. 겁먹을지도 몰라요.”
이때, 인자한 모습의 할아버지 한 명이 다가와다.
나유빈은 서둘러 인사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어떤 고3 학생이 이번에 시험을 잘 봐서 커닝 소동에 휘말렸다고 하던데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해서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러 왔죠.”
강별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굳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 강다인이 커닝해서 성적이 잘 나온 거예요. 만약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징계 처분해주시면 돼요.”
그는 강다인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었다.
방금 담임 선생님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사정한 덕분에 처벌받지 않도록 배려해줬더니 정작 본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강다인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어차피 감사할 줄도 모르는데.
교장 이재필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강다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다인 학생이 커닝했는지 안 했는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문제를 다시 푸는 거야. 테스트 한번 받아볼래?”
강다인은 이재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만약 제가 커닝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면 날 모욕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봐요.”
강별이 냉소를 지었다.
“그래. 일단 시험이나 잘 보고 얘기하지?”
잠시 후 나유빈은 강다인에게 시험지를 건네주었다.
“이따가 끝나는 시간 알려줄게.”
강다인은 자리에 앉아 펜을 들고 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교무실은 조용했고, 다들 옆에 서서 강다인만 지켜보았다.
제일 가까이 서 있던 나유빈은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나가는 강다인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월말고사 시험보다 난이도가 훨씬 더 높았지만 뜻밖에도 거의 다 맞혔다.
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교무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던 김지우는 문제를 풀고 있는 강다인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내 강별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별이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설마 다인 언니가 다시 시험을 보는 건 아니겠죠?”
강별이 콧방귀를 뀌었다.
“맞아. 죽어도 커닝 안 했다고 잡아떼기에 결과로 증명해야지 않겠어?”
김지우는 곧장 강다인을 향해 걸어갔다.
“다인 언니, 이제 그만 화 풀어. 다들 언니를 믿으니까 굳이 무리할 필요 없어.”
강다인은 묵묵부답하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고 절대로 김지우 때문에 페이스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꿈쩍도 안 하는 강다인을 보자 김지우는 입술을 깨물고 강별을 바라보았다.
“별이 오빠, 다인 언니가 아직도 화가 났나 봐요.”
강별이 발끈하며 말했다.
“강다인, 지우가 얘기하고 있잖아. 안 들려?”
강다인은 고개를 들었다.
“나 지금 문제 푸는 중이야. 안 보여?”
강별은 말문이 막혔다.
“지우가 너를 위해 상황을 모면할 기회를 마련해줬는데 얼른 잡지 않고 뭐 해? 이따가 개망신이나 당하고 싶어?”
“지우야, 일단 다인이 시험을 다 볼 때까지 방해하지 마.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
나유빈은 참다못해 말했다. 누가 봐도 완벽한 풀이라서 어쩌면 강다인이 커닝하지 않은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김지우는 못마땅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단지 강다인이 본인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용납하지 못했다.
김지우는 옆에 서서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성적이 좋게 나오겠어?’
하지만 최근 강다인의 변화를 지켜본 만큼 왠지 모르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유빈은 곧바로 다른 선생님과 빠르게 채점했다.
의자에 앉은 강다인의 마음은 유난히 차분했다.
설령 강별 옆에 딱 붙어 있는 김지우를 보더라도 이제는 무덤덤했다.
역시 관심이 없으면 상처도 받지 않는 법이다.
나유빈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결과 나왔어요.”
김지우가 고개를 돌렸고 속으로 강다인이 시험을 망치길 바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강별이 싸늘하게 말했다.
“선생님, 만약 성적이 엉망이면 굳이 발표할 필요 없어요. 망신당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아니요! 다인은 시험을 아주 잘 봤어요. 심지어 월말고사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는데 성적이 더 좋아요.”
이 말을 듣자 가슴을 졸이던 강다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떠올랐다.
강별은 표정 관리가 안 되었고 시험지를 빼앗아 직접 확인했다. 점수는 누구도 속일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강다인은 정말 시험을 잘 봤다.
김지우도 까치발을 들고 채점 결과를 보고는 순식간에 질투심에 휩싸였다. 강다인이 언제부터 공부를 이렇게 잘했단 말이지?
이재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진실이 드디어 밝혀졌네요. 다인 학생이 좋은 성적을 거둔 이유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군요.”
나유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인이가 요즘 열심히 하는 건 사실이에요.”
강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고 시험지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강다인이 정말 커닝하지 않을 줄이야!
순간 눈앞의 강다인이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재필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진상이 드러난 이상 다인 학생을 비방한 사람은 사과해야지 않겠어요?”
김지우의 표정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