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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강다인은 우뚝 멈춰서더니 예의 바르면서 어딘가 서먹한 말투로 말했다. “서준 오빠, 하늘 오빠, 별이 오빠.” 인사라도 안 하면 또 삐져서 버릇없이 군다고 혼낼 게 뻔했다. 지금은 굳이 이런 일로 실랑이를 벌여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강별은 눈썹을 까딱했다. “오늘 시험은 잘 봤어? 열심히 공부한다고 크루에 합류하는 것조차 거절하더니 대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지 궁금하네.” 강별의 비아냥거림에도 강다인은 끄떡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눈엣가시 취급당하기 마련이니까.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더 열심히 해야지.” 최선을 다해 성적을 올려 운성대학교에 합격해서 이 집안을 떠날 것이다. 강하늘이 피식 웃었다. “넌 어렸을 때부터 공부랑 거리가 멀었잖아. 고2까지도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닌데 졸업하기 직전에 벼락치기 한다고 되겠어? 기껏해야 열심히 하는 척 보여주기식에 불과하겠지. 어차피 지우보다 성적이 낮을 텐데, 뭐.” 김지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 오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다인 언니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님의 칭찬도 받았단 말이에요. 성적순이 모든 걸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강다인은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고, 가슴 속에 분노가 차올랐다. 사실 전생에 성적이 안 좋은 데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시험을 잘 볼 때마다 김지우가 항상 태클을 걸었기에 오빠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인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오답을 작성해서 제출했다. 매번 김지우보다 성적이 낮은 이유는 단지 더는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수능을 볼 때 김지우를 제치고 그녀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동준의 강요에 김지우와 같은 대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이유로 몇 등급 낮은 학교에 지원했다. 설령 그녀의 성적이 더 좋은 학교에 충분히 합격하고도 남았는데 말이다. 이를 떠올리자 강다인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애를 썼다. “방으로 먼저 가볼게.”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고, 이번만큼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다음 날은 주말이라 강다인은 실컷 자다가 깼다. 1층에 밥 먹으러 내려갔더니 거실이 텅 비어 있었다. 다들 트레이닝 캠프에 간 듯싶었다. 강다인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채운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휴대폰을 켜고 게임 경기에 관한 기사를 확인하자 주최 측에서 역시나 부활전 공지를 발표했다. 이는 전생과 마찬가지였다. 부활전 소식을 접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감돌면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욕이 불타올랐다. 그래야만 준결승에 진출해 결승전에서 이석민에게 복수할 수 있다. 물론 전생에 강인 크루가 우승을 차지한 건 운이 좋아서였다. 이석민이 결정적인 순간에 출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그들이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다만 상대방이 왜 기권했는지는 죽을 때까지 이유를 몰랐다.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라는 둥, 집에 잡혀가 경영수업을 받는다는 둥 소문이 무성했지만 본인이 나서서 입장을 표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임 설명을 읽어보던 강다인은 갑자기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이때, 머릿속으로 문득 이석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월말고사의 성적에 따라 게임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약속했기에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적어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생각할 참이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고 고민 끝에 이석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지난주 방과 후 보건실에 가지 않은 이유는 둘째 오빠한테 집에 늦게 들어간 사실을 들켰기 때문이에요. 오빠가 내 비밀 아지트를 발견할까 봐 못 갔어요.] 문자를 보낸 다음 대화창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궁금한 마음에 이석훈의 인스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게시물이 없었다. 어떻게 인스타도 안 할 수 있단 말이지? ‘희한하군.’ 한편, 문자를 확인한 이석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형, 누가 보낸 문자야?” 이석훈은 곧바로 화면을 껐다. 고준성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프사를 보니까 여자 같은데? 혹시 전에 도와줬던 그 여자애는 아니지? 이름이 뭐였더라?” “쓸데없는 말이 좀 많네?” “정곡을 찔린 거지? 지난주만 하더라도 보건실에서 야근하더니 갑자기 발길을 끊고 요즘은 시종일관 얼굴이 뚱해 있잖아. 혹시 둘이 싸웠어?” 이석훈이 고개를 돌리자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인데 형에 대해 모를 것 같아? 연기 좀 작작 해!” 이석훈은 휴대폰을 들고 발코니로 가더니 고개를 숙여 대화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보건실이 비밀 아지트란 말인가? 이내 무의식적으로 웃으며 강다인의 인스타에 접속했다. 대부분 일상생활을 공유한 게시물이며 누가 봐도 아기자기했다. 그리고 한참을 스크롤 하다가 문득 그녀의 곁에 너무 오랫동안 붙어 있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석훈은 어플을 끄고 뒤돌아서 거실로 걸어갔다. 강다인은 종일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화났나?’ 방해될지도 모르니 또 문자를 보낼 용기는 없었고, 월요일에 성적이 나오면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주말 내내 그녀는 집에서 복습했다. 김지우는 오빠들과 트레이닝 캠프에 머물면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월요일 아침. 1층으로 내려간 강다인은 드디어 김지우와 오빠들을 만났다. 다만 사이가 더욱 돈독해진 듯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주방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강별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말했다. “오늘 성적 나오지?” 강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크루에 합류하라고 일찌감치 말했을 텐데? 어차피 네 성적으로 좋은 대학교에 가는 건 글렀으니 공부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트레이닝 받는 게 낫지 않겠어? 우리 집안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언젠간 유명해지기 마련일 테니까. 하지만 소중한 기회를 제 발로 뻥 차버렸으니 지우한테 줄 수밖에.” 전생에 대체품이 되었던 굴욕이 떠오르자 강다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난 딱히 상관없는데?” 이내 주방에서 아침밥을 챙기고 뒤돌아서 거실을 나섰다. 대수롭지 않은 강다인의 모습에 강별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시험을 잘 봤는지 두고 보자고. 흥!” 김지우는 크루에 합류하는 것을 거절하는 강다인을 보자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어쨌거나 게임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만약 강다인이 합류하게 되면 자신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별이 오빠, 그만 화 풀어요. 다인 언니도 삐져서 심술부리는 거예요. 나중에라도 크루에 합류하기로 하면 자리를 바로 양보할게요.” 강별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지우가 일찍 철이 들었네.” 김지우의 얼굴이 살짝 굳더니 속으로 약이 바짝 올랐다. 그동안 악착같이 게임 연습을 한 것도 사실 강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강다인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김지우는 게임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둬 다시는 강다인에게 크루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못 하도록 남몰래 다짐했다. 강별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어쨌거나 부활전이 아주 중요한 만큼 이번에 지면 아예 기회조차 사라지게 된다. 김지우는 열심히 하지만 게임에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부활전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녀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다. 이석민을 이기기 위해서는 실력자가 필요했다. 현재로서 강다인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하지만 자존심 상하게 먼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자신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조심스럽게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은 강다인이지 않은가? 남매의 추종 관계에 이미 익숙해진 탓에 갑자기 180도 바꾸려고 하니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대체 언제까지 심술을 부릴 생각이지? 정녕 자신이 먼저 머리를 숙일 때까지 버틸 작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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