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강다인은 등을 꼿꼿이 세웠다. 김지우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강동준이 김지우를 입양할 때 딱히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친동생처럼 대해줬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김지우가 소리소문없이 오빠들을 빼앗아 간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다 사이가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
강서준이 큰 소리로 호통쳤다.
“강다인,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가 네 목숨을 노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 이게 다 지우랑 잘 지내게 하기 위해서잖아. 힘든 일도 아닌데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어? 대체 언제까지 삐져 있을 건데!”
“삐진 적 없어.”
강다인은 강서준의 말을 듣자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다시 삼켜버렸다.
어차피 물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전생에도 변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무용지물이었다.
다시는 옛날처럼 오빠들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이제 변명은 물론 남이 무슨 생각 하든 관심이 없었다.
강다인은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교과서를 집어 들어 책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챙긴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
소파에 앉아 있는 강서준은 골치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강다인, 지금이라도 크루에 합류하겠다고 약속하면 여태껏 있었던 일은 이유 불문하고 넘어가 줄게.”
이 말을 듣는 순간 강다인은 어이가 없었다.
전생에 했던 모든 일이 고작 우스갯거리에 불과했단 말인가?
강다인은 단호한 발걸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갔다.
강서준은 짜증이 난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지환이 다가와서 말했다.
“서준 도련님, 다인 아가씨께서 싫다는데 굳이 강요할 필요가 있나요? 그나마 지우 아가씨가 계셔서 다행이네요.”
강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엄연히 달라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요즘 도련님들이 집을 비우신 동안 다인 아가씨가 하교하고 나서 글쎄 안부를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죠. 어찌나 매정한지 소름이 끼칠 정도라니까요?”
강서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차를 몰고 별장을 떠났다.
2층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은 강다인은 강서준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마도 트레이닝 캠프에 갔을 것이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틀린 문제집을 다시 한번 복습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밤을 꼴딱 새우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서둘러 책가방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방에 가서 샌드위치를 들고 급히 집을 나섰다.
강서준이 제일 먼저 거실로 내려왔다.
이내 멀어져가는 강다인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요즘 다인 아가씨는 기사님과 동행하지 않고 혼자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죠. 월요일에 지우 아가씨가 도련님들이랑 의논하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지각한 이후로 화가 나서 다시는 기사님의 차를 타본 적이 없어요.”
강서준의 표정이 착잡하게 변했다.
강하늘이 다가와서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고작 조금 늦었을 뿐인데 쩨쩨하게 삐지다니! 관심이라도 바라는 건가?”
강별이 하품했다.
“이게 다 서준 형의 마음이 약해지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는 거야. 형이 이번에 넘어가면 강다인은 앞으로 점점 더 기고만장해질 테니까.”
강서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다인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기가 왔다는 건 자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분명 기회를 줬지만 본인이 놓쳐버렸다.
오빠들의 대화를 엿들은 김지우는 눈웃음이 번지더니 신이 나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서준 오빠, 하늘 오빠, 별이 오빠, 좋은 아침이에요. 얼른 밥부터 먹죠?”
김지우의 활기차고 밝은 모습을 보자 강서준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나마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란 여동생이 한 명 더 있어서 다행이었다.
...
학교에 도착한 강다인은 밤새 잠을 못 잤으니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수업할 때만큼은 자칫 놓치는 내용이라도 있을까 봐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다 선생님이 문득 김지우를 지목해 질문을 던졌지만 정작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끝내 대답을 못 했다.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우 학생, 요즘 수업 중에 자꾸 딴짓하던데 이번에 복습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시험을 망칠지도 몰라.”
김지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이를 본 박지민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선생님! 강다인이 요즘 수업을 열심히 듣던데 정답을 알 수도 있어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강다인에게 쏠렸고, 다들 구경거리라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평소에 김지우보다 성적이 더 낮았기에 대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강다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답을 술술 얘기했다.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정확해! 다들 열심히 공부하는 다인 학생을 본받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김지우는 강다인을 몰래 흘겨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만약 게임을 하는데 시간을 쏟아붓지 않았더라면 분명 대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강다인에게 관심을 빼앗기는 바람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속으로는 언젠간 그 대가를 받아내리라 다짐했다.
칭찬받은 강다인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하교 후에 보건실에 가는 대신 집으로 돌아갔다.
최대한 강서준에게 낌새를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김지환의 시선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강다인은 저녁을 먹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고 문을 잠그고 나서야 긴장이 서서히 풀렸다.
그리고 숙제하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어쨌거나 오늘 보건실에 안 갔으니 이석훈에게 얘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를 기다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쨌거나 매번 뻔뻔스럽게 찾아간 사람은 자신이지 않은가?
‘문자를 보내야 하나?’
강다인은 난감한 얼굴로 휴대폰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나중에 보내?’
이내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숙제하기 시작했다. 어제 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점점 감겼다.
책상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그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강다인은 알람 소리에 깼다.
그리고 황급히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아침이 되었다.
강다인은 숙제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점심때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보건실에 찾아갔다.
하지만 이석훈은 보이지 않았고, 용기를 내어 안에 있는 다른 선생님에게 물었다.
“혹시 이석훈 선생님은 안 계시나요?”
“지금 식사하러 갔어.”
강다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오기로 했다.
방과 후 다시 보건실에 찾아갔지만 여전히 보지 못했고, 낮에 계셨던 의사 선생님만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발견한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학생, 오늘은 내가 당직이야. 딴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에 집중해. 연애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니까.”
강다인의 얼굴이 빨개졌지만 딱히 변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몰래 보건실에 갔지만 이석훈은 없었다.
이내 실망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가 보건실에 기다리고 있던 나날에 익숙해져서 그런 듯싶었다.
그제야 이석훈에게 의지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강다인은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이번 생만큼은 자기 힘으로 살아갈 것이며 절대로 남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월말고사를 준비하는데 몰두했다.
이번에는 좋은 성격을 거두리라 맹세했다.
시험이 끝난 후 그녀는 꽤 자신이 있었고 100등 안에 드는 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친구들이 문제가 어려웠다는 원성이 자자해서 조금 걱정되었다.
휴대폰을 꺼내 이석훈의 대화창을 켰지만 무슨 내용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 듯싶었다.
인간관계에는 서툰 편인지라 결국 짜증을 내며 휴대폰을 껐다.
강다인은 울적한 기분으로 책가방을 챙겨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트레이닝 캠프에 안 가고 총출동한 오빠들 때문에 북적거리는 거실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거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서 오빠들과 김지우의 상봉을 방해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