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김 집사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돌연 거실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확 깨뜨렸다.
“뭘 얘기하고 있어?”
익숙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순간 백아린의 여유로운 자태를 무너뜨리고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게 되었다.
권은비는 기쁨에 고개를 돌리더니 남자가 한 손으로 갓 벗은 슈트를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 넥타이를 푸는 모습을 보았다. 온몸에서 느슨한 금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서준 씨, 회의가 벌써 끝난 거야. 내가 기억하기로는 반 시간 뒤에 끝나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녀의 말은 간드러진 애교가 넘치게 했지만, 그 속에는 꽤 많은 뜻이 감춰져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녀가 박서준의 마음 속에 남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고, 회의 시간까지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어떤 시점에서는 현모양처와 별 다를게 없었다.
박나정은 백아린을 곁눈질해 보더니 그녀가 얼어붙은 듯한 모습을 보고, 그녀가 권은비와 박서준의 미심쩍이 관계에 질투한 것이라고 여기고 속으로 승리한 기분이 들면서 비웃더니 참다못해 한술 더 떴다.
“바쁜 사람이 어째서 가족 모임에도 여유로울 수가 없다니, 은비 씨가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
권은비는 앙탈스럽게 박나정을 바라보았다.
“언니, 이 사람 탓하지 말아요. 서준 씨가 요즘 회사의 리조트 개발안에 매달려서 정신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어떤 부분에서는 소홀했던가 봅니다.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그녀는 말할 수록 수줍어하며 결국 두 볼이 빨개지기도 했다.
엄연히 박 사모님 신분으로 자처한 것 같았다.
백아린는 흥미 없어 하며 다리를 들어 이 분쟁이 많은 곳을 떠나려 했다. 특히 같은 하늘 아래 머무르기만 해도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온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말이다.
“어딜 가려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백아린이 내딛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억지로 못 들은 척하면서 강제로 자세를 취하면서 박서준이 다음 말을 하기 전에 전력 질주의 속도로 정원으로 통하는 입구까지 달리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서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바로…
다음 순간, 그의 팔이 무시할 수 없는 힘과 그녀의 피부를 데일 수 온도와 함께 그녀의 어깨를 닿았다.
마치 사람에게 뒷목 잡힌 랙돌 고양이처럼, 귓가의 피부는 그녀의 뇌보다 먼저 어젯밤 뜨거웠던 기억을 되살리더니, 붉고 뜨거워졌다.
박서준은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팔굽에 있는 여자의 수줍은 표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왜, 부부가 된 지 언젠데, 아직도 보면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그럴 듯 말 듯 손을 들어서 백아린의 뜨거운 귓볼을 스쳤다.
짜릿한 느낌에 백아린의 몸이 가볍게 떨리더니 순간 박서준을 힘껏 밀쳤다!
“누가 당신이랑 부부사이야?”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어제 이혼서류에 서명했는데, 박서준 씨께서 잊었다면 병원에 가서 알차하이머에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해 봐!”
말이 끝나자마자 손희진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서준아, 너 와이프 화약이라도 먹은 거야. 들어오자마자 온 집안 식구들이 얘한테 사레들렸어!”
“우리 박씨 집안이 얘한테 뭘 잘못했다고, 여기서 얘 눈치를 봐야 해?!”
셋째 숙모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래. 있는 집 아가씨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내 생각에는 며느리를 찾으려는 은비같은 예의 바르고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찾아야 무탈하는 거야!”
권은비는 즉시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셋째 숙모님, 농담하지 마세요. 저랑 서준 씨는 아직…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어요…”
말하면서 그녀는 참다못해 박서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남자의 시선은 마치 백아린의 몸에 달라붙은 듯했다.
강렬한 시선은 백아린의 아름다운 얼굴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부드러운 귀,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터늘넥 셔츠, 심지어 소매에 드러난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몇 초 동안 머무르면서, 전혀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나눠주지 않았다.
권은비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오르더니, 백아린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앞으로 다가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백아린 씨, 오늘 해볕이 센데 왜 이렇게 꽁꽁 싸매고 계세요?”
그녀는 웃음 속에 칼을 품으면서 백아린의 옷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집안이 더우니 에리를 푸시죠!”
말은 부드럽지만 동작은 오히려 가차 없었다!
권은비는 경험이 많았고, 이미 다 겪어본 사람들이니 이런 날씨에 이렇게나 높은 에리를 입는 것은, 분명 사람들한테 들켜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벌써부터 박서준은 이 와이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태껏 백아린과 어떠한 신체 접촉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조사해 왔다.
그래서 백아린이 감추고 싶은 것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백아린을 재빨리 권은비의 손을 후려쳤다.
“권은비 씨, 경찰이 몸수색하려고 해도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데, 네가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인권 침해한다고 고소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녀는 손바닥에 힘을 힘껏 실어서 권은비의 손등을 움츠러들도록 강하게 때려, 즉시 새빨간 손자국이 새겨졌다.
권은비는 화가 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데, 하필이면 박서준이 옆에 있는 것을 고려해서 억울해 하며 말했다.
“백아린 씨, 저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당신이 땀을 흘리지 말라고 도와드려한 거예요. 날씨가 이렇게나 더운데, 더위 타면 어쩔려고요?”
말하면서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냥 단추를 몇 개를 푸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감추려고 하세요. 설마, 뭔가 말 못하는 사정이 있는 거예요?”
백아린은 전혀 그녀가 떠보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냉소하며 말했다.
“계속하세요. 이참에 인권 침해를 고소하는 김에 비방 혐의와 명예훼손을 함께 고소할 참이에요.”
“그때 가서 재판을 열게 되면, 무조건 당신의 죄를 입증할 수 있겠어요.”
백아린은 안색이 변하더니 한참 지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면서, 옆에 모든 시선을 백아린에게 사로잡힌 박서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서준 씨, 백아린 씨께서 저한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백아린이 일부러 거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서준은 여전히 매우 가까이 있었고 그의 시선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자리한 조금 야릇한 붉은 자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서준아, 아린아, 너희 둘 같이 서재로 와라!”
서재에는 향기로운 차 향이 묘하게 맴돌고 있었고, 맑고 지속적인 향기는 맡기만 해도 곧바로 좋은 차임을 알 수 있었다.
박씨 가문의 전대 가주는 은퇴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위압감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 있는데도, 늘 꼿꼿이 세운 등과 꼼꼼하게 빗은 머릿결은 눈앞의 어른신을 어디를 보아도 수십 년 전 결단력이 통치자였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진철은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보더니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눈앞의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말해 보거라, 무슨 소란이냐?”
그는 비록 늙었지만 왕년의 통찰력이 있는 눈빛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눈앞의 가장 마음에 든 손자이자 박씨 가문의 미래 가주를 의미심장하게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서준아, 네가 먼저 말해 보거라. 아린이를 괴롭힌 거 아니야?”
말이 끝나자마자 이미 자세를 취했다.
박서준과 백아린의 이혼은 박진철에게는 거론할 만한 큰 일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젊은이들이 성질을 부리면서 일으킨 소란에 불과했다.
박서준의 대답이 필요 없다는 듯 박진철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네 할머니의 파리 패션 상담회는 무탈하게 끝냈어. 아마 다음 주면 돌아올 예정이야.”
얇은 눈꺼풀은 들어 올릴 때마다 박서준만큼이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너 설마 굳이 이렇게 좋은 날에, 네 할머니를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