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권은비는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박서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입술을 깨물며 스피커를 켰다. 다음 순간, 박서준의 목소리가 곧바로 백아린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장부장님.”
옆에 있던 장부장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얼른 다가가 공경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박 대표님. 무슨 지시사항이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에요?”
박서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서 듣는 사람을 저절로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장부장은 머뭇거리면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결국 사실대로 핵심만 짚어 상황을 설명했다.
“… 지금 양측이 말다툼을 해서 서로 상대방을 내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서하영 씨는 저의 브랜드의 블랙 카드 고객님이어서, 박나정 씨의 VIP 자격을 박탈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말은 순식간에 박나정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녀는 즉시 앞으로 뛰어가 전화를 빼앗아 박서준에게 소리쳤다.\
“서준아, 너 무조건 누나의 편을 들어야 한다!”
“네 이 전처는 정말 너무 오만방자해. 내가 농담 몇 마디 했다고 나를 비꼬고 조롱하기 시작했어. 누가 그년한테 그런 자격을 줬지? 그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우리 박씨 가문의 돈으로 산 거 아이야?”
“누나 절대로 이대로 못 넘어가. 지금 이 사람들이 그 뭐 서하영이라는 사람이 블랙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마침 너도 블랙 카드를 가지고 있고 등급도 분명 걔보다 높을 거 아니야, 어서 사람을 시켜 그들을 내쫓으라고 해!”
서하영은 한 발 물러서면서 백아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리 말하는데, 내 블랙 카드가 박서준 것보다 등급이 높을지는 장담 못 해.”
백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냉소했다.
“괜찮아, 누가 더 높은지는 상관없어. 오늘 이 문 밖으로 쫓겨날 사람은 절대 나 백아린이 아니야!”
권은비는 백아린 쪽의 상황을 살피면서 서둘러 다가가 애교를 떨었다.
“맞아. 서준 씨, 분명 백아린 씨가 나한테 적개심이 너무 커서, 그 화풀이로 언니한테 이렇게 대하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린 그저 차를 사려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욕설을 퍼부을 필요는 없잖아.”
잠시 멈추고 나서, 그녀는 다시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너희 재산 분할 공증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니까 백아린 씨가 고른 차가 꽤 비싸던데.”
그녀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모든 것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는 박서준에게 암시하고 싶었다. 백아린이 아직 재산 분할을 받지 않았는데도 고급차를 살 돈이 어디서 났을까?”
박서준의 돈을 몰래 빼돌렸거나, 아니면 출처가 불분명한 돈일 것이다. 그 성질은 더욱 미심쩍이었다.
백아린은 그녀의 수작을 몰를 리가 없다. 하늘에 대도 맹세하는데, 그녀가 고른 차는 6천에서 1억사이의 차인데 어떻게 비싼 고급차라고 할 수 있을까?
박서준도 명색에 한 회사의 대표인데, 자기 아내가 이렇게 싼 차를 사는 걸 보고도 부끄럽지 않나?"
백아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박하려는 순간, 전화 너머로 남자의 오만하고 절제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준 돈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온 공간이 삽시에 조용해졌다.
“재산 공증도 내려오지 않았고, 이혼 절차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
“내 와이프가 내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권은비의 예쁜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렸고, 입꼬리를 굳힌 채 변명하려 애썼다.
“서준 씨… 나, 나 그런 뜻이 아니라..”
박서준은 그녀의 말을 추호도 들을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장부장님, 제 명의의 블랙 카드를 제 아내 백아린에게 양도하겠습니다. 오늘 매장 전체를 대여해서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쇼핑하게 해주세요.”
백아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하영와 눈을 마주치고는, 사양하지 않고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블랙 카드 고마워, 곧 다가오는 다음 주 수요일의 전남편!”
박서준은 그녀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권은비, 만약 다음번에도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전화한다면, 내 생각에는 네 이름은 내 연락처에서 존재할 필요가 없을 거야.”
말을 마치고 권은비가 말류하려고 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권은비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고개를 들어 박나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나정 언니, 이제 우리 어떻게요?”
“어떡하긴?”
백아린은 두 팔을 가슴에 휘감고 권은비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야지!”
박나정과 권은비가 아무리 욕설을 퍼부어도, 지시를 받은 장부장은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보안 요원을 데리고 두 사람을 공손하게 매장 밖으로 내보냈다.
넓은 로비에는 백아린과 서하영, 그리고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원이 남아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백아린에게 해명하려고 했다.
“죄… 죄송합니다, 고객님. 모든 것이 오해인 것 같습니다!”
백아린은 두 팔을 가슴에 휘감고 차가운 눈빛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직원은 자기가 ‘우울증’이 발병해서 백아린과 서하영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하고, 이어서 취업 환경이 너무 나빠서, 자기는 부모도 부양해야 하고 어린 자녀도 있어서 직장을 잃으면 온 가족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었다.
“저 정말로 이 직업을 잃을 수가 없어요!”
직원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고, 마치 백아린이 자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하려는 듯 곧장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을 태세였다.
“연기 다 했어?”
백아린은 초상집인 것처럼 울고 있는 직원을 내려다보며, 머리 위에 있는 CCTV를 가리켰다.
“아까 너희 부장님이 내려올 때, 하영이가 이미 그에게 방금 일어난 일의 CCTV 영상을 보여 달라고 했어.”
“여기서 나한테 동정심을 호소할 시간 있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개인 업무 능력을 쌓는 데 전념해. 혹시라도 나중에 직업을 바꿔서 도로를 쓸어도 양아치로 되지 말고.”
그녀는 다리를 들어 직원의 허리를 넘어서,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며 이젠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장부장의 곁으로 걸어갔다.
장부장은 눈썰미 있게 바로 물었다.
“고객님, 전에 보셨던 차를 계속해서 보실 거예요. 제가 모든 차종을 개별적으로 소개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메르세데스-벤츠 G 클래스 두 대로 해주세요. 박서준의 계좌로 결제해 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방금 휴대전화에서 받은 카톡 메시지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재빠르게 타이핑을 하면서 물었다.
“어디서 계약하나요?”
매장에서 나올 때, 백아린은 기지개를 켰다.
“됐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어. 내일 박서준한테 가서 잘난 체 하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네.”
서하영은 옆에 서서 걱정했다.
“아니, 난 왜서 네 전남편이 너한테 보통 이상으로 신경 쓰는 느낌이 들지?”
“네 말대로라면, 집안 모임에서도 널 지켜주고, 곤경에서 널 구해주고, 지금은 블랙 카드를 너한테 주기까지 하잖아. 옛말에 '남자의 돈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고 하던데, 그가 너한테 아직 마음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백아린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조수석의 차 문을 열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웃기지 마. 모든 남자가 다 박서준과 같은 건 아니야. 이 두 대의 G 클래스가 그의 눈에서는 내가 중고 시장에서 구한 자전거 두 대랑 별 다를 게 없을걸?”
서하영은 그녀의 비유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차를 시동 걸고, 가속 페달을 밟기 전에 간단한 코멘트를 달았다.
“난 어쩐지 너희 둘의 결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차는 굉음을 내며 먼지를 날리고,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갔다. 햇볕 속의 먼지 그림자는 빛으로 변해 고층 빌딩의 꼭대기 사무실에 투사되었고, 얼룩진 빛을 반사했다.
박서준은 하얀 카톡 채팅창에 뜬 ‘너희 가족이 나 건드리지 않게 해’라는 답장에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문 여는 소리에 그를 깊은 사색에서 깨어나게 했다.
“들어와.”
박서준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고, 고개를 들자마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영욱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대표님, 작업실 쪽의 담당자가 보내준 자료가 도착했습니다.”
박서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아서 처리해.”
강영욱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 때, 말하기가 무척 껄끄러웠다.
“이 담당자, 아무래도 대표님께서 직접 만나보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