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카톡 얘기가 나오자 나는 그제야 주한준이 불만을 가진 일이 내가 그의 카톡을 차단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이나 된 일인데 이제야 발견했다고?
하지만 명색이 투자자인데 직설적으로 뭔가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마도 잘못 눌려진 것 같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주한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남진아, 핑계를 대도 좀 말이 되는 걸 생각해. 카톡 있는 거 가지고 뭐가 그렇게 신경 쓰여서 차단을 했지?”
주한준은 여전히 단호한 말투를 고사했다.
마치 날 이미 꿰뚫어 본 듯한 자신감이었다.
나는 그의 태도에 갑자기 반격을 하고 싶어 져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받아쳤다.
“그러니까. 고작 카톡 하나 가지고 대표님께서 왜 이리 안달이실까요?”
주한준은 말문이 막힌 듯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나와 주한준은 그저 복도에 마주서서 서로 바라보며 한동안 그 누구도 말을 내뱉지 않았다.
꽉 쥔 주먹 때문에 내 손톱은 살을 파고들었다.
마음도 왠지 모르게 아려왔다.
잠시 후, 주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남진아,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는 다시 야심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벽에 기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결국 나는 끝내 주한준의 카톡을 다시 추가하지 않았다.
메일, 회사 단톡방, 그리고 전화까지. 주한준이 정말로 시킬 일이 있다면 나한테 연락할 방법이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한두 마디 때문에 전처럼 말을 들어주고 아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다짐과 별개로 난 결국 잠을 설치고 말았다.
꿈에서 주한준은 단호한 목소리고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모습에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깨버렸고 더는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이 되자 나는 다크서클이 심하게 드리운 눈으로 회사로 향했다.
초췌한 내 모습과는 다르게 임지아의 얼굴에는 마치 봄이라도 온 것 같았다.
그녀는 포장한 커피와 크루아상을 다른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는 걸 발견하자 그녀는 웃으며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선배, 선배 커피 여기 있어요.”
위병이 난 지 며칠 되지 않는 시점이라 커피를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마음으로 건네준 거라 거절하기에도 애매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커피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이하연이 놀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헐, 까르띠에 러브 팔찌 아니에요? 심지어 다이아 파베네요! 너무 이쁘다.”
나는 이하연의 눈길이 닿는 곳을 따라 바라봤다. 그러자 단번에 임지아의 손목에 걸린 그 눈부신 핑크골드 팔찌가 눈에 띄었다.
그녀와 너무 어울리는 색이었다. 원래 하얗던 손목이 더 하얗게 보이는 것 같았다.
“대표님께서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이하연은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감탄했다.
“진짜 내 생에 대표님 같은 사람이 메르세데스로 나 출퇴근 바래다주면 진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임지아는 볼이 발그레해지며 부끄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꼭 이루실 거예요.”
나는 두사람의 잡답에 끼어들 마음이 전혀 없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발을 떼는 순간 이하연이 계속 말했다.
“대표님도 참 로맨틱하시지. 팔찌뿐만 아니라 카톡 프사까지 커플로 맞추셨잖아요. 우리 같은 솔로들 어떻게 살라고 그러시는지 몰라.”
“커플 프사”라는 몇 글자가 내 귀에 박혀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 앉은 뒤 몰래 회사 단톡방을 열어보았다.
원래 노을이었던 주한준의 프사가 보타이를 매고 있는 고양이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임지아의 프사인 핑크색 모자를 쓰고 있는 고양이 사진과 누가 봐도 커플이었다.
잘 어울렸다.
임지아는 연속 이틀 동안 모든 사람에게 커피를 돌렸다.
오영은 쪽에서 확정된 스케줄이 전달되어 들어왔다. 내일 오후에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인즉슨, 오늘 오후에는 내가 혼자 영한 그룹으로 가서 주간 브리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 더 미워달라고 해볼까 고민하던 사이 임지아가 들뜬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선배, 오후에 저희 몇 시에 출발해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조금 지나서야 그녀가 영한 그룹으로 가는 일정을 물어본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임지아도 기획팀 팀장을 맡고 있으니 영한 그룹으로 가서 브리핑을 한다는 것도 충분히 말이 되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 시에 가죠.”
임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서 말했다.
“그럼 저 준비하러 가볼게요.”
출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임지아가 말한 준비라는 게 자신의 메이크업을 고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우리는 영한 그룹에 도착했다.
프런트 직원이 임지아를 발견하자 공손하게 그녀를 부르더니 우리를 전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안내까지 해주었다.
아주 지극히도 공손한 서비스였다.
한 달 전, 나와 오영은이 처음 이곳에 왔었을 때엔 프런트 직원의 태도가 이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었는데 말이다.
역시, 누군가가 뒤에 있으니 대우부터 달랐다.
“선배, 먼저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응접실까지 도착하자 임지아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아주 익숙하게 주한준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익숙해서 마치 제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도 임지아는 나오지 않았다.
“형수님, 왜 여기 계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정지훈이 서류를 한 더미 든 채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 비서님. 대표님은 아직도 바쁘신가요?”
“아니요. 오후에는 미팅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형수님이랑 하는 미팅이요.”
정지훈은 말을 마친 뒤 주한준의 사무실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제가 한 번 가볼게요.”
“조금 더 기다려보죠. 안 급해요.”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정 비서님 앞으로는 그냥 제 이름 부르시면 돼요.”
그는 “형수님”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되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지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사무실 쪽을 흘깃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형수님… 아니, 진아 누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저…”
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임지아는 슬쩍 정지훈을 바라보다 다시 내게 눈길을 보냈다.
“선배, 들어오세요.”
지극히 덤덤한 말투였다.
나는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평소대로 업무를 브리핑했다. 끝나자 맞은편에 앉은 주한준을 바라보려다 그가 고개를 숙여 임지아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봐버렸다.
임지아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딱 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순간 자신이 이 자리에 너무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 다른 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둘의 꽁냥 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기는 싫었다.
마침 이때 계속 침묵을 일관하던 임지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선배, 이런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의견이 하나 있는데요.”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주한준의 목소리도 잇따라 들렸다.
“너도 프로젝트 책임자 중 한 명이니까, 의견 정도야 물론 낼 수 있지.”
하지만 임지아는 나를 계속 바라봤다. 내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적인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이성적으로 답했다.
“임 팀장님, 말씀하시죠.”
“제가 어젯밤에 저희 게임 화면을 자세히 봤는데요. 뭐랄까, 제가 보기엔 색깔 명도가 좀 부족한 거 같아요.”
임지아는 말하면서 주한준을 바라봤다.
“저희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더 밝아야 하지 않을까요? 연애 느낌도 나야 하고요.”
연애 느낌이라.
나는 묵묵히 이 몇 글자를 곱씹다가 물었다.
“임 팀장님이 말한 연애 느낌이란 게 어떤 거죠?”
임지아는 갑자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머뭇거렸다.
누가 보면 내가 그녀를 어떻게 했다고 할 법한 표정이었다.
나는 말투를 살짝 누그러뜨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임 팀장님, 전 그저 일 얘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괜찮아, 하고 싶은 얘기 해 봐.”
주한준이 갑자기 끼어들어 부드럽게 타일렀다.
“남 팀장님이 다른 사람 의견 무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지아는 내가 있잖아?”
임지아는 격려를 받고 용기가 생긴 듯 웃으며 말했다.
“연애는 아름답고 로맨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주요 컨셉과 컬러를 핑크로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오빠, 오빠 생각은 어때요?”
지금 게임에서 쓰고 있는 주 색상은 연한 파랑이었다.
깔끔하고도 발랄하며 편안한 게임을 유저들에게 선사해주고 싶어 선택한 컬러였다.
하지만 임지아는 연애 느낌을 내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남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죠?”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내 생각을 불러들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한준의 시선을 맞췄다.
“제 생각에는 현재 버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대표님께서 꼭 수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조금 수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줄도 알아야 했다.
내 말을 들은 주한준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물었다.
“지금 컬러를 유지하려는 이유는요?”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사랑에는 무수하게 많은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특정된 한 컬러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을 들은 임지아의 얼굴은 갑자기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난 그저 일 얘기를 한 것뿐이었다. 사적인 감정이 전혀 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을 향했다. 주한준은 마지막 결론을 정리해 내게 말했다.
“남 팀장님이 현재 게임 화면에 핑크 컬러를 조금 섞어보시죠. 둘이 어우러질 수 있게 말입니다.”
판결이 내려졌다.
이번 브리핑은 내 예상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미팅이 끝나자 이미 밖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내가 서류를 정리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을 때 주한준과 임지아는 어느 레스토랑에 갈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흘끔 쳐다보곤 했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빨리 정리를 마치고 퇴근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주한준이 말했다.
“그거야 간단하지. 남 팀장님, 같이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