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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지아의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을 보아 주한준의 말이 진짜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면 그저 인사치레인 것뿐인가? 나는 괜히 누군가의 미움을 사기 싫어 돌려서 거절했다. “대표님 요청은 감사하지만 아직 끝내야 할 업무가 남아있어서요. 다음엔 제가 사겠습니다.” 주한준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목소리도 왠지 모르게 한 톤 높아져 있었다. 마치 내가 호의를 받을 줄 모른다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임지아는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옆에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빠, 아무래도 진아 선배 정말로 바쁘신 거 같은데요.” 아니나 다를까 불만이 들어와 버렸다. 나는 제자리에서 주한준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기다렸다. 잠시 뒤 그가 다시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했다. “지아가 그쪽 회사로 간지 한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남 팀장님이 많이 수고해 준 것 같아서요. 제가 그래도 남 팀장님한테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바로 주한준의 뜻을 알아차렸다. 임지아를 대신해서 나한테 진 빚을 갚겠다는 것이었다. 임지아도 알아차렸는지 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역시 오빠가 생각이 깊다니까요. 선배, 이번만큼은 함께 가시죠?” 성의가 담기다 못해 넘쳐흘렀다. 마음속으로는 불편했지만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받아줄 건 받아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한준과 임지아를 따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꽤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코너 쪽에는 누군가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감미로운 선율에 답답하던 내 마음도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로맨틱한 장소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나을 텐데 굳이 왜 자신까지 불러들였는지 말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심화연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레스토랑에 찾아온 것이었다. 나를 발견하자 화가 가득 나있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진아야. 너… 네가 왜 여기 있니?” 그렇다. 심화연도 이런 장소, 이런 타이밍에 내가 있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준은 나를 끌어들이고야 말았다. 나는 태연하게 입안의 스테이크를 씹으며 말했다. “대표님이랑 임지아 씨가 식사를 요청해서요. 거절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오게 되었습니다.” 심화연은 잠시 분노를 거둬들이고 웨이터에게 식기 한 세트를 더 요청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녀는 임지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지금 아가씨들 참 대단하더라.” 그녀는 비아냥이 담긴 말투로 임지아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임지아의 손에 들린 포크가 접시에 떨어졌다. 임지아의 얼굴을 붉어졌다가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켜쥐었다. 꽤나 모욕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이때 옆에 앉아있던 주한준이 여유롭게 금방 썰어놓은 스테이크 접시를 들어 자연스럽게 임지아 앞에 놓여있던 것과 바꿔주었다.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임지아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예상 못했다는 듯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제가 해도 되는데.”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심화연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나는 갑자기 오래전 심화연과 처음 만났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우리는 함께 뷔페를 먹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처럼 막무가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는 지금과 별다를 게 없었다. 그날 식사 내내 나더러 이것저것 나르라 시켰고, 마침 가재철이라 가재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한 마디 때문에 나는 몇 시간 동안 계속 가재껍질을 발라야 했다. 집에 돌아갈 때 손에 온통 가재 냄새가 물들어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고생해서 얻어낸 게 고작 그녀의 “뭐, 성격이 나름 바르긴 하네.” 이 한 마디였다. 그리고 내가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주한준은 그저 내 맞은편에서 묵묵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한 번도 입을 열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그는 심화연의 앞에서 임지아에게 스테이크를 썰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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