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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나는 결국 그 둘의 호의를 거절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았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계속 쿡쿡 쏘던 그런 고통은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는지라 회사에 출근한 뒤 얌전히 위약을 챙겨 먹었다. 그래도 책임자인데 프로젝트를 말아먹을 순 없으니까. 이 게임으로 돈을 벌여 들여야 하는데 내 몸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약을 먹을 때 그 모습을 보게 된 김가온은 죄책감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진아 누나, 다 저 때문이에요. 누나 혼자 야근하도록 하는 게 아닌데.” 그래서인지 오늘은 저녁 7시가 넘어가도 먼저 퇴근을 하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에 저녁을 사겠다고 말을 건넸지만 김가온은 그런 날 말렸다. “저녁 금방 도착할 거예요.” 김가온이 미리 배달을 시킨 줄 알았는데 잠시 뒤 엄겨울이 꽤나 큰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형. 왜 이렇게 늦었어요. 저랑 진아 누나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네.” 나는 김가온과 엄겨울을 번갈아 쳐다보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상자에 눈길이 머물렀다. “여기 들어있는 거 설마 저녁밥이야?” 엄겨울은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보냈다. “똑똑하네.” 반찬 네 가지에 국 하나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에는 아직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엄겨울이 덧붙였다. “이 상자 보온이 꽤 잘 되거든. 이렇게 가져오길 잘했네.” “이 갈비탕 어디서 주문한 거예요? 너무 맛있는데?” 김가온은 갈비탕을 한 모금 마셔본 뒤 감탄했다. “사장님 인심도 좋으시고요.” 엄겨울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내 그릇에 갈비 하나를 더 놓아주었다. 그 상황을 목격한 김가온은 그를 흘겨보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형, 저도 주세요.” 나와 엄겨울은 그의 재롱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갑자기 입구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호기심에 시선을 돌려보니 퇴근을 하다 다시 돌아온 임지아가 있었다. 임지아의 시선은 엄겨울의 얼굴에 잠깐 머물다가 테이블 위의 음식으로 향했다. 그러다 웃으며 말했다. “엄겨울 씨, 선배한테 저녁 가져다 드리러 오셨나 봐요.” 엄겨울은 고개를 돌려 2초 정도 가만히 있다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임지아 씨는 식사하셨나요? 안 하셨으면 같이 드시죠?” “괜찮아요.” 임지아는 상냥하게 거절했다. “물건만 챙기고 다시 갈 거예요.” 그러자 우리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온 뒤 엄겨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던 머뭇거림을 난 발견 해버렸다. 나를 보는 눈빛도 어딘가 복잡하게 변해버린 거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 엄겨울을 1층까지 배웅하러 내려갔다. 그제야 나는 그가 저녁에 지하철을 타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이 막힐까 봐. 가온이가 그러더라고, 어제 너 아팠다고. 음식은 따뜻하게 먹어야지.” 그래서 음식이 식을까 봐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게 큰 보온박스를 들고 지하철을 타기 굉장히 불편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마음이 불편하고 미안 해나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다음에는 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괜찮아, 어렵지도 않은데 뭘.” 엄겨울은 여전히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도 지루할 참이었는데 취미로 요리도 연습할 수 있고. 일석이조지.” 그에게는 항상 듣는 사람이 기분 좋게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 맞다.” 엄겨울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임지아 씨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오래 기다렸죠?” 나와 엄겨울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제야 멀지 않은 곳에 주한준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따라 밤안개가 많이 껴있어 그레이색 롱코트 차림으로 어두운 가로등아래 서있던 그의 머리카락 끝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조금씩 달려있었다. 아마 꽤 오래 밖에 서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기다리던 아가씨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더니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선남선녀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 나는 급히 시선을 거두고 엄겨울을 향해 말했다. “지하철까지 바래다줄게.” 엄겨울은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발걸음을 떼려 할 때 주한준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렸다. “남 팀장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네요.” 가로등 아래에는 그렇게 네 명이 모이게 되었다. 주한준은 엄겨울 손에 들려있는 박스를 보며 물었다. “이건 뭐죠?” 엄겨울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임지아가 바로 입을 열었다. “보온박스요. 글쎼 엄겨울 씨가 진아 선배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저녁식사까지 준비해서 오셨지 뭐예요.” 주한준은 엄겨울을 훑어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 팀장님은 코드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친구들도 아주 잘 사귀나 보네요.” 아주 평온한 말투였지만 나는 그의 말속에 감춰져 있는 비아냥거림을 눈치챘다. 엄겨울이 겸손하게 말했다. “진아가 평소에 절 많이 도와줬거든요. 요 며칠 위가 아프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나를 대신해 해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주한준은 피식 웃었다. “어젯밤에는 생리통이라 하더니, 오늘은 위가 아프다고. 남 팀장님 몸 상태는 수시로 그렇게 바뀌나 봅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한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뜻이지? 내가 일부러 아픈 척이라도 했다는 건가? 임지아도 알아챘는지 끼어들면서 말했다. “오빠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생리기간일 때 확실히 다른 곳도 자꾸 아프고 그래요.”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거였다. “그래?” 주한준은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의미심장했다. “그럼 남 팀장님, 몸 좀 잘 챙겨야겠네요.” 그 한 마디는 마치 나를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몸을 잘 챙기라고. 이 말이 주한준 입에서 나오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갑자기 어젯밤에 임지아를 향해 해명하는 그의 말이 생각나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럼요. 주 대표님께서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해 주셨는데, 제가 당연히 몸을 잘 챙겨야죠.” 주한준의 눈동자가 떨리며 의아함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말다툼을 하는 데에 낭비하긴 싫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주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엄겨울에게 눈짓을 보냈다. 엄겨울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더니 내 옆으로 따라왔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길을 건넜다. “여기까지만 바래다줘.” 나를 바라보는 엄겨울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지만 참는 눈치였다. 나는 꽤 단호하게 그에게 일러주었다. “일도 바쁜데 이런 바보 같은 짓 더 이상 하지 마.” 엄겨울은 뜸을 들이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아야. 뜬금없는 거 알지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살짝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주한준…” “투자자랑 프로젝트 책임자의 관계일 뿐이야.”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엄겨울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바보 같은 짓 아니네, 뭐.” 왜 더 일이 꼬이는 건지 난 알 수 없었다. “됐어, 바쁜데 더는 안 잡을게. 빨리 가서 일 봐.” 엄겨울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좀 더 늦으면 막차 시간도 지나겠다.” 나는 그의 말대로 바로 사무실로 돌아가 코드를 마저 작성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노트북을 들고 복도로 들어가는데 고개를 들자 바로 주한준을 마주쳐버렸다. 그는 아직도 그 그레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무릎을 넘기는 긴 기장에 딱 맞아떨어지는 어깨, 클래식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몇 년 전 내가 그에게 선물했던 그 코트와 똑같았다. 뭐, 그냥 우연일 것이다. 코트 위에 달린 허리끈은 묶지 않은 채 뒤로 자유롭게 풀어두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역시 걸어 다니는 옷걸이라는 호칭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덤덤하게 눈길일 거두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하루종일 바삐 돌아쳤더니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대표님이셨네요. 죄송해요, 제가 안경을 안 쓰고 있어서.” 주한준은 더는 말이 없었지만 그 검은 눈동자만큼은 꼿꼿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 나는 더욱 불편 해났다. “저 이미 퇴근했습니다. 내일 다시 얘기하시죠, 대표님.” 그를 상대하기엔 너무 지친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 했다. “카톡까지 차단할 필요가 있었나?” 내 말에 전혀 신경을 안 쓴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따지는 말투로 물었다. “엄겨울이 오해할까 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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