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나는 손가락을 꼬며 부끄러움을 참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훈은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내가 왜 너희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
“그럼 내가 안 온 거로 하자.”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처음에 하지훈에게 그렇게 했으니 그가 우리 집에 복수하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정도인데 어떻게 우리 집을 도울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뻔뻔하면 그에게 부탁하러 왔냐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어서 도망치려 하자 하지훈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말해봐, 뭘 부탁하고 싶은지. 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멍하니 두리번거리며 그에게 무엇으로 부탁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 몸?’
만약 하지훈이 정말 나에게 충동을 느낀다면 결혼 3년 내내 수없이 많은 밤을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내가 오지 않았었다고 생각해.”
하지훈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그는 키가 컸는데 내 앞에 서니 나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살짝 숙여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웃었다.
“이렇게 입고 와서 내숭 떠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당장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는 갑자기 내 허리를 안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결혼 3년 내내 난 바닥에서 자느라 네 몸에 손도 못 댔는데... 너 자신을 조건으로 나에게 부탁해 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며 그에게 물었다.
“너...무슨 말 하는 거야?”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마치 깊은 바다처럼 느껴져 나는 이유 없는 마음이 당황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고 내 슬립의 어깨끈에 길쭉한 손가락을 걸어 살며시 아래로 내렸다.
얼굴이 확 빨개지는 걸 느끼며 나는 그를 밀어내고 소리쳤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말아. 나도 네가 우리 집안을 도와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사람을 모욕하면 안 돼.”
나를 보는 하지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는데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너를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해?”
“모욕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가 좋아하는 것은 분명 다른 사람인데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모욕이 아니고 뭐겠는가 말이다.
하지훈은 갑자기 돌아서서 사무용 의자에 다가가 앉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는데 순간 나는 그의 두 눈에 냉기가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옷은 성의 있게 입었는데 태도에 성의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가.”
하지훈이 우리 집을 돕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의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부모님이 달려왔는데 아빠는 매우 다급하게 물었다.
“어때? 지훈이가 우리를 도와줄 의향이 있대?”
내가 고개를 젓자 아버지는 갑자기 화를 내며 욕을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놈, 지금 잘 나간다고 사람을 몰라보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애초에 너를 그 자식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거야. 개자식.”
우리 엄마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맞아. 그 자식 평소에 얌전한 척하더니 뜻밖에도 배은망덕한 놈이야!”
나는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지훈이가 우리 가문 인맥으로 사업한 것도 아니고 우리 집 돈도 안 썼는데 왜 배은망덕한 놈이에요. 사실 지훈이가 우리를 돕지 않는 것도 당연해요. 우리가 예전에 지훈이에게 그렇게 대했으니깐요.”
부모님은 입술을 깨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만 짓고 계셨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는 머리가 더 아팠다.
저녁에 오빠는 휴대전화를 들고 호형호제하던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그들이 도움을 청하려 했다.
전화해서 술 마시러 오라고 할 땐 다들 매우 빨리 왔는데 지금은 아무도 감히 오빠의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빠는 화가 나서 휴대전화를 내동댕이치며 의리가 없다고 욕했다.
나는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그런 오빠를 위로했다.
“됐어.오빠, 지금 이 사회는 인정이 너무 없어.”
엄마는 옆에서 울고 계셨다.
지금 우리 집 형편으로는 재기는 불가능했고 빚을 갚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거의 매일 사람들이 빚 독촉을 하고 있는데 빚쟁이들 때문에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또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영아, 아니면 하지훈을 다시 만나봐. 걔는 지금 돈이 있으니 네가 좀 빌리는 건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엄마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
“그래, 이혼해도 재산은 나눠 가질 수 있어.”
나는 이불 속에서 움츠러든 채 내가 이미 하지훈으로부터 빈털터리로 이혼당한 일을 말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알게 되면 반드시 하지훈을 욕할 것이다.
오빠는 화를 내며 한마디 했다.
“됐어요. 아영이 창피하게 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예전에 지훈이를 그렇게 대했는데 지금 아영이가 가서 부탁하라는 건 아영이 자존심을 깎는 일 아니겠어요?”
어머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낮에 하지훈이 너를 모욕하지 않았어?”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또 혼잣말하셨다.
“생각해 보니 하지훈은 평소에 착실하고 너의 말을 잘 따랐어. 비록 우리가 지금 초라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존중하는데 어떻게 너를 정말 모욕할 수 있겠어.”
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한숨을 내쉬더니 베란다를 바라보며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아빠가 살기 싫다고 하자 엄마도 따라 울었는데 부모님이 이러는 것을 보면서 나는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사실 지금은 주로 돈을 모아 빚을 어느 정도 갚는 것이 시급했다.
며칠이 지나 몸이 막 낫자마자 나는 일자리를 찾으러 나갔다.
일반적인 업무는 임금이 낮고 수입이 느리지만 일부 고급 클럽의 주류 판매 직원은 임금이 꽤 높았다.
예전에 나는 친구들과 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기분이 좋으면 술 판매원에게 많은 팁을 주었다.
나는 예전에 자주 가던 그 클럽을 갔다.
클럽의 매니저는 나를 알고 있고 예전의 친분을 생각해서 빨리 채용했는데 또 나에게 VIP 룸을 전담하게 했다.
그런 거물들에게 술을 서빙하면 팁은 당연하니 말이다.
하지만 룸에서 하지훈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는 여태껏 이런 곳에 온 적이 없는데 적어도 나랑 결혼한 그 3년 동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하지훈은 예전에 내가 이런 곳에 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내가 친구와 올 때마다 그는 항상 내 앞을 막아서서 가지 말라고 하며 그런 곳은 좋은 곳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매번 나는 그를 한바탕 모욕하고 쫓아냈다.
그때를 떠올리니 이 남자는 정말 어질고 좋은 남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하지훈은 센터에 앉아있었는데 다리를 꼬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웃을 듯 말 듯 입꼬리르 씩 올리고 사악하고 도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보니 예전의 그 온순하고 어질고 선량한 모습은 모두 꾸며낸 것인 듯싶었다.
조용히 나를 쳐다보는 그의 도도한 자태에 나는 부끄러움이 밀려와 이 룸에 있을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난처해진 내가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을 때 룸에서 갑자기 몇 번의 장난기 어린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하지훈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전에 나와 오빠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다.
어이없게도 지금 그들은 모두 하지훈에게 아첨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예전에 하지훈에게 좋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금 하지훈의 앞에서 아첨하기 위해 나를 모욕하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줄행랑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술 차를 밀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러가려고 할 때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