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선우진이 딱히 거절하지 않자 강희진은 동의한 걸로 여기고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나가 복주머니를 달아주었다.
그런데 숙빈 옆을 지나가다가 그만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숙빈은 욕설을 내뱉을 뻔했지만 차마 내뱉진 못하고 독기 서린 눈빛으로 강희진의 뒷모습을 째려보았다.
강희진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는데 선우진은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때 바로 맡았다.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전날 밤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열기에 붉어진 눈꼬리와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이 떠올랐다.
흠칫 놀란 선우진이 고개를 숙여 보니 강희진의 두 손이 그의 허리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문 적이 있었고 그녀는 그의 목에 매달려 안긴 적도 있었다. 자꾸만 야릇한 생각이 들어 선우진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를 밀어냈다.
“달지 않아도 되니 그냥 두고 물러가거라.”
강희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전생의 이야기를 바꿀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전생에 강원주가 연회에서 총애를 잃었는데 이번 생에 나로 바뀌어도 결말은 변하지 않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난 폐하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없었고 앞서 모든 일들도 순조롭게 풀렸어. 왜 갑자기 날 밀어내는 거지?’
당황한 그녀의 모습에 선우진은 마음이 저릿했다.
그가 뭐라 하려던 그때 강희진은 한 걸음 물러나 복주머니를 내려놓고는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숙빈의 고소해하는 눈빛을 보고도 상대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음속이 혼란스러워 대체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연회 후반부에도 강희진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연회 분위기가 한창 뜨거울 무렵 강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하게 말했다.
“폐하, 소첩 몸이 좋지 않아 그런데 먼저 돌아가 쉬어도 되겠사옵니까?”
참으로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선우진은 손을 흔들며 강희진의 청을 허락했다. 그녀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선우진이 이유도 묻지 않았고 만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에게 마음이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선우진의 총애는 현재 그녀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총애를 잃는다면 그녀가 마주해야 할 곤경이 지금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강희진은 온갖 감정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초봄의 바람조차 복잡한 생각을 날려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손 한 쌍이 뻗어 나오더니 강희진의 입을 막고 가짜 산 뒤로 끌고 갔다. 등이 돌에 닿았지만 상상했던 고통은 없었고 대신 뜨거운 큰 손이 그녀를 감쌌다.
“웁.”
강희진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눈앞의 사람은 덤덤하게 웃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폐하?”
“많이 놀랐느냐?”
선우진이 매우 가까이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은 순간 강희진은 귀와 목까지 다 빨개졌다.
“화비는 피부가 정말 여리구나.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붉어졌다.”
강희진은 선우진이 검술을 연마해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있다는 걸 기억했다. 두 손이 어깨에 닿더니 귓불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가볍게 신음했다.
선우진은 조금 전부터 가라앉지 않던 불길이 다시 치솟아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사정없이 퍼붓는 입맞춤에 강희진은 정신이 몽롱했다. 눈을 떴을 땐 산소 부족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폐하, 아까는... 화가 나신 게 아니었사옵니까?”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묻자 선우진이 가볍게 웃었다.
“짐이 왜 화를 내겠느냐?”
“소첩이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강희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우진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난 사람은 화비가 아니냐?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짐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녀는 선우진이 정말로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여 서둘러 반박하지 않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농이 지나치시옵니다. 소첩이 어찌 감히 폐하께 화를 내겠나이까?”
“짐이 복주머니를 달지 못하게 해서 그러는 것이냐?”
선우진은 갑자기 강희진의 귓가에 바싹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네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짐은 너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강희진은 시뻘게진 얼굴로 선우진을 밀어내려 했지만 선우진은 오히려 그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겉옷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
“폐하.”
깜짝 놀란 강희진이 소리를 질렀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아직 밖이온데...”
선우진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웅얼거렸다.
“어젯밤 욕조도 밖이었는데 짐을 거절하지 않았지.”
그러니 오늘도 거절해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강희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젖히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선우진의 입맞춤에 응했다.
어젯밤 선우진이 밖에서 그러는 걸 허락한 건 강원주가 그녀에게 약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금은 멀쩡한데. 설마 밖에서 또 그 난리를 쳐야 하는 거야? 전생에 폐하께서는 이렇게 거리낌이 없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선우진은 그녀의 목덜미를 더욱 세게 물어뜯었다.
“집중하거라.”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강희진은 무의미한 몸부림을 포기했다. 협조하면 오히려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강희진은 다리가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나지막이 용서를 빌었다.
“폐하,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궁으로 돌아가면 무엇이든 다 들어드리겠나이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선우진의 어깨에 기댔다. 요염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선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옷을 입혀주었다.
“가자. 연회가 끝나지 않아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선 아니 된다.”
강희진은 허리가 쑤시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더 이상 묻지 않고 소매 속에 뭔가를 숨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안녕히 가시옵소서.”
그는 강희진을 부축하면서 말했다.
“돌아가서 푹 쉬어라.”
강희진은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소매에서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 살아있는 듯한 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선우진이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옥패였다. 그녀는 옥패를 힐끗 보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명광궁으로 돌아왔을 때 강원주가 주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이 날아왔다.
다행히 재빨리 피한 덕에 간신히 화를 면했다.
“쓸모없는 년. 감히 연회에서 폐하의 심기를 건드려? 네 어미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강원주가 크게 화를 내는 걸 보면 이미 연회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강희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드린 선물이 매우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어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선물이 없으면 아무 핑계나 대서 뒤로 미루거나 춘희를 시켜 가져오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폐하께서는 좋은 것만 보시고 살아오신 분인데 그깟 하찮은 복주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실 리가 있겠느냐?”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희진은 옥패 하나를 꺼냈다.
“폐하께서 제가 떠난 뒤에 특별히 남겨주신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화를 내시지 않으셨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요.”
강원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이 황제의 옥패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황제가 화를 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뿐만 아니라 몸에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내주었다는 건 그녀에 대한 총애가 깊다는 걸 뜻했다.
강원주는 분노와 기쁨이 뒤섞였다. 이득을 본 것은 ‘화비 강씨’지만 황제가 총애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강희진이었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강희진을 따라온 춘희에게 물었다.
“저 말이 다 사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