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강원주는 독기 어린 눈으로 달려가 강희진을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그러고는 탁자 위의 흰 가루를 가리켰다.
“네년 짓이지? 춘희가 그러는데 아까 숙빈이 백설기를 들고 들어오기 전에 너와 마당에서 얘기를 나눴다며? 빌어먹을 년아, 그 틈에 약을 탄 것이냐?”
경대 위에 연지와 분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최상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범한 백성들은 넘볼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진주가 박힌 연지함이 홍목 경대 위에 놓여있었고 어디서 꺾어왔는지도 모를 진달래꽃이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강희진은 일부러 실수한 척 경대 위로 넘어졌다. 팔을 휘젓자 연지와 분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고 오색찬란한 빛깔들이 뒤섞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강희진은 한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울먹거리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
“언니,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전 단지 분으로 몸의 흔적을 가리려 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혹여 누가 우리를 의심할까 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봄날에 처음 피어나는 꽃처럼 가냘프고 여렸다. 그리고 억울한 듯한 말투는 금방 녹은 냇물처럼 저도 모르게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소녀의 맑고 순수한 모습도 묻어났고 갓 태어난 사슴처럼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연약한 모습은 듣는 이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키게 했다.
강원주는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계속 무섭게 몰아붙였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어디서 불쌍한 척하는 것이냐? 내가 사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강희진은 속상한 척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다. 경대 아래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는데 정교하고 우아한 게 딱 봐도 귀한 물건이었다.
상자는 고급 목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고 뛰어난 장인이 정성껏 조각한 듯한 예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테두리에 화려한 금색이 둘러져 있었는데 햇빛이 상자를 비춘 듯 눈이 부셨다.
또한 뚜겅 위에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활짝 핀 모란꽃을 방불케 했고 존귀함과 화려함을 뽐냈다.
강희진은 상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고 말했다.
“언니, 이건 제가 전에 구한 귀한 연고입니다. 운 좋게 얻게 된 것인데 한 상자밖에 없어요. 언니의 얼굴 상처에 바르면 무조건 깔끔하게 나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더 악화시키는 연고였다. 이는 강희진이 짜놓은 거대한 판에 놓인 또 하나의 말이었다.
강원주는 화려한 상자를 힐끗 보더니 마지못해 받는 척하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다음부터는 이런 게 있으면 빨리 가져오도록 해라. 어서 치우거라. 며칠 뒤면 봄맞이 연회가 열린다. 날 대신해서 가는 만큼 내 얼굴에 먹칠했다간 네 어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며칠 후 궐 안에 봄맞이 연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높은 관리와 황족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연회가 막 시작될 무렵 내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비마마 납시오.”
강희진은 화려한 궁중 복장을 차려입고 나타나 순식간에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홍색 긴 치마를 입고 복잡한 황실 장신구를 착용했는데 머리에는 찬란한 보석이 박힌 관을 쓰고 있었다.
화장을 한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고 고귀한 기품을 드러냈다. 얼굴에 분홍색 연지를 발랐고 눈은 별처럼 빛났다.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리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눈부셨다. 특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걸을 때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피부도 어찌나 눈처럼 희고 매끄러운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몸매는 여인의 부드러움과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분홍색 치마는 그녀의 요염함과 어우러져 순수하면서도 유혹적인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고 고귀하고 단아한 분위기까지 흘러넘쳤다.
화려한 연회장을 사뿐사뿐 거니는 모습은 만개한 모란꽃처럼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칠 때면 마치 바람이 잔잔한 호수를 어루만지듯 파문을 일으키면서 황홀경에 빠져들게 했다.
강희진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움직임 하나하나, 미소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그림과 같았다.
그녀는 궁녀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며칠 전 만났던 숙빈이 앉아 있었다. 숙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친한 척 말을 걸었다.
“화비마마 며칠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정말 절세미인이 따로 없네요.”
강희진은 일부러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숙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늘 아름다웠던 게 아닌가요?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요.”
그 순간 주변 사람들 모두 침묵했다. 특히 숙빈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는데 더는 뭐라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강희진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금빛 옷을 입은 선우진이 앉아 있었다.
강희진이 일부러 무례하게 굴었다는 걸 꿰뚫어 본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날카롭고 매혹적인 눈빛에 끌렸다.
이대론 넋을 잃을 것 같아 옆에 있는 배운종에게 서둘러 연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봄맞이 연회 시작이오.”
배운종의 외침소리와 함께 춤꾼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고 대신들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비빈들은 황제의 마음을 얻으려고 저마다 정성스럽고 독특한 선물을 바쳤지만 오직 강희진만이 몸에 지니고 있던 복주머니를 떼고 단상으로 올라가 선우진의 허리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선우진에게 찰싹 안겼다.
그녀는 한 마리의 교활한 여유처럼 언제나 선우진에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
강희진의 행동에 선우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겉으로나마 흔들린 마음을 감추려고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봄맞이 연회의 화려한 무대에서 강희진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선우진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런데 선우진이 매정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무엄하다. 물러가거라.”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여인의 독특한 매력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다만 충동을 억제하려 애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