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계집종들은 강원주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거나 급히 약을 찾았다.
방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강희진은 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저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 얼굴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지난 생의 오늘은 봄맞이 연회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아무 일 없었더라면 절대 이 시기에 강원주에게 약을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그녀의 수완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다 인과응보였다.
강희진은 안으로 들어가 가식적인 걱정을 하는 대신 그냥 돌아섰다. 아직 방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고요한 안방, 강희진은 문을 열고 들어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경대 앞에 앉아 손톱에 박힌 미세한 잔여물을 처리했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지더니 숙빈과 우연처럼 스쳤던 장면을 떠올렸다.
몸종이 부축하던 순간 강희진은 약 가루를 손에 묻히고 숙빈이 가져온 백설기에 아무도 모르게 뿌렸다.
백설기는 겨울날의 첫눈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모양도 작은 게 참으로 앙증맞았고 가만히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한눈에 봐도 숙빈의 솜씨가 아니었고 화비와 숙빈의 다툼을 일으키기 좋은 기회였다.
지난 생에 강원주 그 멍청이는 기어이 봄맞이 연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선우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그는 강원주를 무려 3개월 동안이나 멀리했고 그 기간 동안 강희진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이 명광궁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강원주는 미친 듯이 그녀를 괴롭혔고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시켰으며 다 끝내지 못하면 욕하고 때리는 건 물론이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뜨거운 땡볕에서 땀과 먼지투성이인 채로 매일과 같이 일만 했다. 연약한 어깨는 닳고 닳아 붉게 부어올랐고 가늘고 긴 손에도 상처투성이였다.
강원주는 승은을 입은 게 강희진이라는 비밀이 발각될까 두려워 밤에는 좋은 연고를 발라주었다. 손과 몸의 살갗이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다시 자라났는데 현재 강원주가 받는 고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강희진은 이 명광궁에서 석 달 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그녀의 두 눈은 항상 핏발이 서 있었고 얼굴도 수척했으며 보살펴주는 궁인도 없었다.
늘 어두컴컴한 촛불 아래에서 혼자 더럽고 힘든 일을 했고 심지어 어떤 때는 촛불조차 없이 어둠 속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다가 가끔 휴식 시간이 생기면 멀리 하늘을 바라보면서 정승댁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명광궁에서 강희진의 슬픔과 피로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목숨은 마치 궁의 티끌처럼 작고 미미했다. 강원주를 대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듯했다.
마치 영혼 없는 꼭두각시처럼 정승과 언니에게 조종당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간신히 살아갔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앞으로 겪을 고통스러운 나날들의 시작일 뿐이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강희진은 온몸이 무감각해졌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조차 잃어버린 채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궁에서 죽어갔다.
죽는 순간까지도 매일 그녀와 함께했던 남자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기만 해도 강희진은 얼음 창고에 떨어진 듯한 추위 속에 빠졌다. 지금 방 안 가득한 햇살조차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지 못하는 듯했다.
전생의 고난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강희진은 복수를 다짐했다. 그녀와 어머니를 해친 모든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늘 가면을 쓰고 있는 위선적인 정승이 그녀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지난 세월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려면 정성껏 준비해서 큰딸이 돋보이도록 해야 했다.
강희진은 봄맞이 연회를 이용하여 앞으로의 나날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그동안 어둠 속에만 갇혀있던 진실을 전부 다 밝힐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이 일들을 해낼 수 없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선우진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강원주의 껍데기를 쓴 자신이 아닌 진정한 자신과 다시 가까이하도록 해야 했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강원주의 몸종이 봄맞이 연회에 입을 화려한 의복을 가져와 살포시 내려놓더니 강희진에게 쌀쌀맞게 말했다.
“마마께서 보내신 옷이니 한번 입어 보십시오. 경고하는데 마마의 것을 잠시 빌려주는 것이지, 가지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랬다간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강희진은 몸종의 큰소리에도 곧바로 반박하지 않고 그냥 덤덤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종의 따귀를 찰싹 때리고 무섭게 말했다.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냐? 마마는 내 언니고 정승댁의 귀한 딸이라서 나에게 뭐라 해도 상관없지만 넌 뭔데? 노비 주제에 어디서 버릇없이 구느냐? 어떻게 할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강원주가 씩씩거리면서 쳐들어오더니 강희진을 보자마자 급히 얼굴을 가렸다. 지금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듯했고 두 눈에 무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탁자에 있는 흰색 가루를 보더니 눈에 다시 음흉함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