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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결혼은 왜 했어?

오늘 밤 홧김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연수호는 유난히 거칠었다. 결국 연달아 몰아치며 쉴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 나지막이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는 무심하기만 했다. “싹싹 빌면 그만할게.” ‘웃기고 있네’ “그럼 네가 먼저 빌어달라고 부탁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며 앞머리가 땀에 흠뻑 젖은 김유정의 모습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연수호가 피식 웃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굴복하지 않을 기세군.” ...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김유정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두 다리는 마치 절단된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힘겹게 일어나 앉아 얇은 이불 속 도자기 같은 피부를 도배한 키스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연수호가 저지른 만행을 고스란히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욕실 문이 열리면서 남색 가운을 걸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촉촉한 갈색 짧은 머리가 이마를 살짝 가렸고, 풀어헤친 옷깃을 사이로 선명한 쇄골과 근육 라인이 훤히 드러났다. 190cm에 육박하는 훤칠한 키와 우월한 이목구비는 흠잡을 데 없고 온몸으로 복잡미묘한 아우라를 풍겼는데 무심하면서 매혹적이고, 자유로우면서 위험한 느낌이다. 순간 넋을 잃고 감상하던 김유정은 불쑥 날아오는 작은 상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연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김유정을 흘긋 쳐다보더니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들이마시며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먹어.” 무뚝뚝한 말투는 감정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김유정은 고개를 숙여 상자를 내려다보았고 다름 아닌 약이었다. 이내 머리가 띵했다. ‘지금 피임약을 먹으라고 한 건가? 몸에 얼마나 해로운데!’ “싫어.” 그리고 약을 집어 들어 연수호를 향해 냅다 던졌다. “콘돔 살 돈도 없으면 정관 수술이나 해.” “설마?” 연수호가 씩 웃었다. “지금까지 산 콘돔만 해도 별장 한 채 값일걸?” “꺼져.” 김유정이 그를 노려보았다. 연수호는 미소를 지으며 방금 불을 붙인 담배를 비벼껐다. 곧이어 바닥에 떨어진 약상자를 집어 들고 포장을 뜯더니 두 알을 꺼내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김유정의 뒤통수를 덥석 붙잡고 입술에 키스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김유정의 동공이 문득 커졌고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입안에 희미한 담배 맛과 진한 쓴맛이 동시에 퍼졌고, 연수호는 혀로 약을 밀어 넣더니 강제로 삼키게 했다. 김유정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쓴맛이 너무 강한 탓에 침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했다. 연수호는 입술을 할짝거리더니 칠흑처럼 까만 눈동자로 기침하느라 온몸을 들썩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랑 아이를 낳고 싶어서 약 먹기를 거부하는 건가? 왜? 자식을 빌미로 내 발목을 붙잡게?” 김유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기침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연수호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고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가 잘난 척할수록 김유정은 화가 더 났다. 이내 옆에서 베개를 집어 들어 온 힘을 다해 던졌다. “당신이랑 아이 낳는 일은 절대 없으니까 꿈 깨.” 연수호는 차가운 얼굴로 몸을 틀어 피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다시 던졌다. 베개는 김유정의 뺨을 스치듯 지나가며 쌩하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나도 원하는 바야!” 김유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아버님만 아니었다면 난들 낳고 싶은 줄 알아? 아들의 뒤치다꺼리도 채 못 했는데 자식까지 돌봐주라고? 내가 할 일이 없다고 고생을 사서 하겠어?” 쿵! 연수호는 굳은 얼굴로 침대 옆에 있는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돌아가신 지 6년이나 된 사람까지 끄집어낼 정도로 핑곗거리가 없어? 아빠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김유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불효자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런 심한 말조차 마다하지 않을 수 있지? “나랑 아이 낳기 싫으면...” 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혼’이라는 두 글자는 험상궂게 일그러진 연수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차마 내뱉지 못했고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결혼은 왜 했는데?” 연수호가 냉소를 지었다. “네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고 싶었던 소원 아니야? 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가 그렇게 좋으면 평생 앉게 해줄게.”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김유정은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어쩐지 이혼 얘기만 꺼내면 난리를 친다고 했더니 이유가 따로 있을 줄이야! 이제는 연수호도 결혼 생활에 점점 녹아든다는 그녀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심지어 마침내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닌지 싶은 착각마저 들었는데... 김유정은 한숨을 내쉬더니 욱신거리는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연수호가 손목을 덥석 붙잡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 “수호 씨, 내가 잘못했어.” 김유정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연수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잘못을 시인하는 건가?’ 김유정은 그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내며 또박또박 강조했다. “너를 사람 취급한 내 잘못이지.” 말을 마치고 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갔고, 방 안에서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김유정!” ... 차에 타자마자 가방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고, 다름 아닌 연수호의 이모 이여진이다. 통화가 연결되고 다급한 목소리가 즉시 들려왔다. “유정아, 어젯밤 일은 서우한테 전해 들었어. 수호랑 이혼한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김유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유난스러운 안서우의 성격상 어젯밤의 일을 얼마나 과대 포장해서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을지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 이여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랑 절대로 이혼하면 안 돼.” 그리고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수호가 지금은 철이 없고 성격이 퉁명해서 그렇지 옛날에는 전혀 안 그랬어. 워낙 처세에 약한 아이라 나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와이프인 네가 잘 가르쳐 줘야 해.” ‘훗, 대체 뭘 가르치라는 거지?’ 김유정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과연 그녀에게 연수호 같은 대단한 사람을 가르칠 능력이 있을까? 이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원국에 유학 가서 무려 13년 동안 떠돌아다녔으니... 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혼자서 타향살이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순간 김유정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했다. 연수호가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살다가 7년 전 결혼 약속 때문에 귀국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막강한 집안 배경을 자랑하는 사람인지라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호의호식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럼 수호 씨 어머니는 외국에서 같이 안 지냈어요?” 김유정은 그동안 줄곧 묻고 싶었던 질문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 지난 몇 년 동안 연수호는 물론 유안 그룹에서 이선영에 대해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김상엽마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당연히 돌아가신 줄 알았지만 매년 연태상의 제사를 지낼 때면 이선영의 묘비는 보지 못했다. 게다가 연씨 가문 저택의 사당에도 위패는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인데 보이지 않고, 설령 죽었다 한들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 사뭇 의심스러웠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그녀는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모. 제가 너무 주제넘었죠?” “아니야, 딱히 비밀도 아닌데 뭐.” 곧이어 이여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수호 엄마는 4살 때 병에 걸려 지금도 온누리 건강원에서 살고 있어.” 김유정은 숨을 죽이고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스포츠카의 핸들을 꽉 붙잡았다. 온누리 건강원은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연씨 가문이 투자해서 설립한 고급 요양시설로서 안에 있는 환자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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