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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정신 차려

곧이어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김유정은 차에 앉아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통화를 마치기 전에 이여진은 인생 선배로서 후배에게 부탁 같은 조언을 했다. “유정아, 만약 수호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이미 돌아가신 수호 아빠를 생각해서라도 쉽게 이혼하지 마.” 김유정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만약 정말 연수호와 이혼한다면 김상엽도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이내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시동을 걸고 별장을 빠져나갔다. ... 2층 창가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는 정원을 빠져나가는 빨간 페라리를 물끄러미 지켜보았고,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는 감정의 변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새빨간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잠시 후, 별장의 대문이 열리면서 검은색 한정판 마이바흐 한 대가 들어섰다. 연수호는 손에 든 와인 잔을 흔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삼촌, 아침부터 웬일이죠?” 말을 마치고 뒤에 서 있는 단아하고 세련된 차림새의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 비서님도 오셨네요.” 신혜정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이우진은 어두운 얼굴로 연수호를 훑어보았다. 느슨하게 묶은 가운 사이로 상반신이 훤히 드러났는데 곳곳에 사랑을 나눈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양다리를 포개어 올려놓은 모습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이우진은 별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유정이는 어디 갔어? 왜 안 보이지?” 연수호는 두 팔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자기 와이프가 어디 갔는지도 몰라?” 이우진이 버럭 화를 냈다. “연수호, 정신 좀 차려.” 그리고 가슴을 도배한 빨간 자국을 손가락질하며 씩씩거렸다. “꼴이 그게 뭐니? 허구한 날 여자를 데리고 집에 와서 밤을 보내는 게 말이 돼? 유정이가 보면 무슨 생각 하겠어?” “훗.” 연수호가 피식 웃었다. “제멋대로 생각하라고 하죠. 어차피 내 알 바 아닌데. 그나저나 삼촌...” 이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외숙모 후보로 한 번 고민해봐요.” “헛소리 집어치워.” 어떻게 입을 여는 족족 심기를 건드리는지 이우진은 화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어쩌면 점점 한심해지는 거지?” 노발대발하는 그를 보자 신혜정이 서둘러 말렸다. “이 대표님, 도련님은 아직 혈기 왕성할 나이라 한창 유흥을 즐길 때이죠. 그만 화 풀어요.” 신혜정은 이우진의 비서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그를 따라다녔고, 워낙 유능하고 일 처리가 깔끔한지라 언행 또한 흠잡을 데 없다. 연수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신혜정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신 비서님의 언변은 따라가지 못한다니까? 아니면 우리 외숙모로 신 비서님도 딱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신혜정은 이우진을 힐긋 바라보더니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도련님, 농담이 심하시네요.” 연수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신혜정에게서 눈길을 떼고 다시 이우진을 바라보았다. 이우진은 조카의 농담을 무시하고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요즘 회사에 안 나가는 이유가 이 여자 때문이야?” 연수호가 흘깃 내려다보자 어젯밤 김유정이 보여줬던 사진과 동일한 것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했다. 이우진은 절대로 한가해서 방문할 사람이 아닌지라 그가 나타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정아진, 26살. 무직, 집에서 작은 물류 사업을 하고 있더군.” 금테 안경 너머로 이우진의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무려 유안 그룹 대표라는 사람이 이런 무능한 인간과 어울려 다니는 거야?” 연수호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지금 아진이를 뒷조사한 거예요?” “워낙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으니 적어도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알아내야지.” 이우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연수호의 표정을 발견하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호야, 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회사까지 몰려줬는데 신경 좀 써야지 않겠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 연수호는 잔에 담긴 와인을 한입에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식 웃었다. “삼촌이 회사를 관리하고 있는데 누가 감히 비웃겠어요?” “유안 그룹은 연씨 가문 산업이야. 나는 기껏해야 부대표에 불과하고 성까지 다르잖아. 그래봤자 널 대신해 임시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뿐이지.” 이우진은 손을 들어 연수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충고했다. “언젠간 네가 혼자서 회사를 경영하는 날이 오게 될 테니까 더는 말썽을 일으키지 마.” “아니면 삼촌한테 회사를 넘겨줄까요? 그러면 삼촌도 떳떳하게 오너로서 경영할 수 있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신혜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수호의 말투는 절대로 농담 같지 않았고 눈빛도 사뭇 진지했다. 연수호가 고개를 들어 이우진을 바라보려는 찰나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연수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삼촌, 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앞으로 쓸데없는 얘기 작작 해. 괜히 소문이라도 퍼지면 또 난리 날 테니까. 그리고!” 이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유정한테 잘해. 네 아빠가 직접 고른 며느리인데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유안 그룹과 이정 그룹의 친분을 생각해야지. 언론에 꼬투리가 잡혀 두 집안이 망신당하는 꼴이 생기지 않게 조심해.” 이우진은 몇 마디 더 당부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 연수호는 탁자 위에 놓인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비서, 어젯밤 사진 홍보팀에서 해결 안 했나?”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말투에 이태호는 어리둥절했다. “대표님? 어젯밤 사모님께서 홍보팀에 처리할 사진이 있다고 따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하루가 멀다고 루머에 휘말리는 상사인지라 비서로서 이미 적응이 되다시피 했다. 보통 사진이 찍히자마자 파파라치들이 곧장 파일을 전송했고, 김유정은 이태호에게 연락해 설령 거액을 들일지언정 홍보팀에게 처리하고 통보했다. 지금까지 고작 사진 몇 장에 수십억의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고?” 연수호가 물었다. “하긴 했는데...” 이태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연수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했어?” “사모님께서... 그게...” 이태호는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듬거렸다. 연수호의 말투에 짜증이 묻어났다. “어서 얘기해!”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모님께서 말하길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자기 얼굴에 먹칠하려고 안달 난 사람은 내버려 두는 게 맞다고 했죠.” 그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력으로 당시 김유정이 전화를 걸어 얘기했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대폰 너머로 유리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전화가 뚝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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