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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사람들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강설아가 박강우를 좋아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강은영이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리 만무했다. 강은영과 박강우의 사이가 워낙 안 좋았는데 갑자기 마음을 돌린 게 더 이상했다. 어르신은 여전히 경계 어린 눈빛으로 강은영을 노려보았다. 강은영은 어르신의 팔에 매달리며 애처롭게 말했다. “할머니, 전에는 다 제가 잘못했어요. 전에는 강설아의 거짓말만 믿고 강우 씨랑 맨날 싸우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어머님….” 강은영은 고개를 돌려 이예란에게 구원요청을 보냈다. 사실 이예란은 줄곧 강설아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기에 겉으로 반감을 드러낼 수 없어서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달라진 강은영의 태도에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어머님, 설아는 몰라도 진미선 그 여자는 믿을 사람이 못 돼요. 그 사람이 뒤에서 설아에게 뭐라고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친딸마저 버린 사람이 가정교육을 시키면 얼마나 잘 시켰을까? 강은영은 속으로 이예란 여사에게 박수를 보냈다. 최근 들어 부쩍 어르신이 강설아를 예뻐했기에 지금 당장 강설아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두를 진미선에게로 돌린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어르신도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 말이 맞긴 하지.” 어르신은 줄곧 진미선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상류사회에서 진미선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가르친 딸이 순수하면 얼마나 순수할까? 게다가 어릴 때부터 이 집에서 자란 강은영이었고 한때는 어르신도 강은영을 손녀처럼 예뻐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박성철과의 추문이 돌지만 않았어도 강은영에게 반감을 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태도가 완전히 바뀐 강은영을 보자 어르신의 마음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강은영을 인자하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네가 찌른 거 아니야?” “믿고 싶지 않으면 강설아 불러서 삼자대면해도 괜찮아요.” 과감한 발언에 어르신의 의심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손자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넌 네 엄마한테서 대체 뭘 배웠니?” 노인은 손가락으로 강은영의 머리를 밀어내면서도 한결 나아진 말투였다. 이예란은 아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들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강은영은 속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강우 성격에 구구절절 해명하는 일은 절대 못할 것이고 그녀를 위해 가족들과 얼굴을 붉힐 일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그의 가족들은 그녀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강은영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어르신에게 말했다. “어머님은 저를 잘 가르치셨는데 강씨 집안 사람들이 너무 나빠요.” 그 말에 이예란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르신도 못 말린다는 듯이 강은영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대질심문은 됐고 한 밤중에 이 소란을 겪었느니 나도 피곤하구나.” 물론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만약 강은영의 말에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이혼 시킬 생각이었다. 강은영은 그제야 어르신의 팔을 풀어주고 박스를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할머니 귀중품은 앞으로 잘 챙기세요.” “녀석.” 어르신은 그후로 귀찮다는 듯이 손자 부부를 내쫓듯 집으로 돌려보냈다. 모두가 떠난 뒤, 어르신은 이예란을 따로 불렀다. “에미 넌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니?” “최근에 은영이가 설아랑 다툼이 잦았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해연 별장의 고용인들도 물갈이를 했더라고요. 알아보는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이예란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설아가 박강우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쓰던 강은영이 돌변하더니 강설아와 싸우고 박강우가 강영물산에까지 압력을 가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진실이 뭔지 속단하기는 일렀다.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해연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 강은영은 박강우가 많이 화나 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스럽게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여보, 아직도 화났어?” 박강우는 말을 안 듣고 본가까지 달려온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몇번 있었는데 매번 돌아갈 때마다 할머니와 크고 작은 불화를 겪었다. 강은영은 고양이처럼 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아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자 박강우의 화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쪽! 강은영은 고개를 들고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빨개진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화 풀어, 응?” 물론 박강우는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내일 나랑 같이 가자고 했잖아.” “하지만 당신이 오늘 가족들 대하는 태도를 보니까 내일 돌아가도 욕 먹는 건 변함이 없었을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박강우는 습관처럼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무심하게 한 말처럼 들려도 그의 굳은 결심이 엿보였다. 강은영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욕먹는 게 싫은 당신 마음 이해해.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나서서 해명하지 않으면 용서받기 힘들었을 거야.” 예전에 그분들이 그녀를 예뻐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설아의 온갖 이간질로 이미 그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팽창한 시점이었다. 옛정이 있었기에 강은영이 먼저 굽히고 들어가서 그들이 어느 정도 받아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바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박강우는 그녀의 이마를 콕 찌르며 굳은 소리로 말했다. 강은영이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 생에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박강우에게서 벗어나는데 쓰느라 많은 일들을 소홀히하고 지나갔다. 물론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곁을 지킬 거라는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도착했어. 내려!” 박강우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안은 채로 차에서 내렸다. 강은영은 궁금한 듯, 큰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았지만 박강우는 애써 무시하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은 얌전히 있어.” 강은영은 입을 삐죽이며 불만을 표시했다. 남자는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온 박강우는 다시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강은영은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영아.” 수화기 너머로 박성철의 울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박성철이 다급히 말했다. “지금 문밖에 있어. 안 내려오면 안으로 들어갈 거야.” 강은영은 무의식적으로 서재의 동향을 살폈다. 일하러 들어갔으니 금방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혹시라도 박성철이 난동을 부릴까 봐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집에 오자마자 찾아온 걸 보면 바로 쫓아왔다는 얘기일 텐데 무슨 꿍꿍이인지도 궁금했다. 어쩌면 지난 생에는 그의 이런 끈질긴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속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은영아.” 박성철은 강은영을 보자마자 피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은영은 교묘히 몸을 비틀어 피하고 차갑게 말했다. “내가 전에 다시 보면 숙모라고 깎듯이 부르라고 말한 적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또 삼촌이 협박했어?” 그는 강은영이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분명 같이 출국하자고 얼마전까지 달콤하게 속삭이던 그녀였다. 강은영은 차갑게 그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부부 일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순간 박성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희가 언제부터 부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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