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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박성철은 차라리 강은영에게 말못할 사정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영아,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돼. 내가 도울 수 있어.” 강은영은 그가 이 정도로 말귀를 못 알아먹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차게 식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힘을 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이거 놔!” 박성철은 그럴수록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해외에 거처까지 다 마련해 놨어. 박강우랑 이혼만 하면 바로 출국할 수 있다고!” 그는 여전히 박강우의 협박으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태도가 바뀌었다고 믿고 있었다. 한편, 전 집사는 강은영이 현관을 나간 순간에 올라가서 박강우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박강우는 서재의 창가에 서서 아내를 안고 있는 박강우를 음침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 비서!” 진기웅이 공손히 답했다. “네, 대표님.” “나가서 쟤네들 올라오라고 해!” 그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역시 다 거짓말이었어. 온갖 달콤한 말로 내 경계를 늦추고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단 거지?’ 진기웅은 강은영이 박성철을 만나러 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뒤돌아선 순간에 박강우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깐!” 진기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대문 앞에서 강은영이 박성철의 귀뺨을 인정사정없이 갈기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리를 들어 상대의 가랑이 사이를 걷어찼다. 박성철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진기웅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모님이 언제부터 폭력적으로 변한 거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상사를 다치게 한 것도 강은영 본인이었다. 그는 그녀의 폭력이 외부인에게만 향하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박성철 부하에게 연락해서 데려가라고 해. 아, 비뇨기과 예약하라는 말도 잊지 말고 전해.” 박강우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진기웅은 순간 강은영과 두 사람이 무척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박성철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강은영을 노려보았다. 그는 지금에야 예전에 전화에 대고 했던 그녀의 말이 연기가 아닌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명백히 그와 선을 긋고 있었다. “정말 나랑 헤어지려는 거야?” “우리가 언제 시작한 적은 있어?” 강은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에게 되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본인이 피해자인 척하다니 기가 막혀서 웃음만 나왔다. ‘대체 지난 생에 난 뭘 보고 이런 인간에게 마음을 준 거지?’ 박성철은 가랑이 사이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강은영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말해. 너랑 강설아는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6개월 전 강설아의 생일 파티 때부터 둘이 만나는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앞에서는 너밖에 없는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웠다. 강설아 얘기가 나오자 박성철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뭘 알고 저러는 걸까? 강설아가 뭔가 흘렸나?’ 그런 생각이 들자 짜증만 치밀었다. 강은영은 그의 미세한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다가 차갑게 말했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역겨운 인간일 줄은 몰랐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야. 숙모에게 꼬리 친 것도 모자라 숙모의 언니에게도 손을 뻗치다니.” 비웃음 가득한 말투에 박성철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분명 그는 잘 숨겨왔다고 생각해 왔다. 강설아의 부모님에게도 절대 알리지 않은 사실이었다.’ 강은영은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못 느껴서 냉소를 지었다. 오늘 완전히 선을 그었으니 아마 며칠은 조용히 지낼 것이다. 지금 가장 급선무는 박강우와 그의 가족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인데 이런 인간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박성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헤어지면 우리 가족들 중에 널 지켜줄 사람은 있고?”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전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언제 나온 건지, 현관 앞에 박강우가 싸늘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가만히 있어도 위압감을 풍기는 존재였다. 박성철은 점점 더 불안에 떨며 조심스레 박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강은영이 달려가서 팔에 매달리자 언제 그랬냐 싶게 그의 얼굴에 자상한 미소가 지어졌다. “여보, 저 인간이 안 만나주면 집에 쳐들어온다고 해서 나온 거야.” 박성철은 순간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다 내 탓이라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박강우는 섬뜩한 눈빛으로 박성철을 노려보며 말했다. “성철이 너 점점 예의가 없어지네. 오밤중에 전화해서 숙모한테 협박질이나 한 거야?” 숙모라는 소리에 박성철은 분노한 눈빛으로 강은영을 노려봤다. 강은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마침 도착한 박성철의 운전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도련님, 어떻게 된 거예요? 오밤중에 비뇨기과는 왜 가요? 원래 대로 장 선생님 예약할까요?” 순간 공기 중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박성철은 자신의 부하를 힘껏 노려보았고 놀란 부하는 무의식적으로 상사의 가랑이를 힐끔거렸다. 박성철은 수치심에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고함쳤다. “보긴 뭘 봐? 빨리 운전이나 해!” 운전기사는 움찔하더니 공손히 그의 뒤를 따랐다. 초라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은영이 물었다. “자기가 시켰어?” 박강우 말고는 이렇게 남의 아픈 곳을 찌를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원래대로 장 선생이라고 했어. 설마 저 인간 비뇨기과 자주 가나?’ 박강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이제 시원해?” 왜 강은영이 박성철에게 이 정도로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녀가 본가에서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로 마음이 바뀌었든 박강우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아직 부족해!” 강은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박강우는 그녀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며 무심하게 물었다. “그렇게 저들이 신경 쓰여?” 박강우는 강은영이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가 박성철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읽은 강은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럴 가치도 없는 연놈들이고.” 그렇다면 뭐가 그녀를 이렇게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박강우는 의문의 눈초리로 아내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직 부족해? 그럼 나한테 말해. 내가 복수해 줄게.” 강은영은 고개를 들고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불현듯 그 모습이 절벽에서 죽어가던 그의 모습과 겹쳐지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는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박강우도 그녀의 떨림을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뭘 두려워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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