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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박씨네 저택. 어르신은 박강우를 보자마자 다가가서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 박강우는 굳은 표정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이거 놔!” 어르신은 정색한 표정으로 차갑게 소리쳤다. 셔츠 단추가 강제적으로 풀리고 두껍게 감은 붕대를 본 순간 어르신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 옆에 있던 이예란도 아들이 입은 상처를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에게 말했다. “강우야, 이런 상황에서도 걔를 감싸고 돌 거니?” “이혼해. 당장 이혼해. 우리 박씨 가문에 저런 며느리는 필요 없어.” 박강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분노한 어르신의 고함이 거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강은영을 향한 박씨 가족들의 분노는 이제 용납할 수 없는 정도에 도달했다. 이예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박강우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박강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정중히 말했다. “집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지금도 그 애 편을 드는 거니?” 어르신은 지팡이로 땅을 탕탕 두드리며 분노에 치를 떨었다. 박강우는 가문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능력이 출중한 손자였고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는 존재였다. 그런 귀한 손자의 옆에 강은영 같이 매정하고 위험한 여자를 둘 수는 없었다. “증조할머니, 사실 이 일은 은영이만 탓할 게 아니에요. 애초에 은영이가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잖아요.” 조용히 있던 박성철이 앞으로 나서며 어르신에게 말했다. “넌 좀 닥치고 있어.” 어르신은 지팡이를 들어 박성철의 어깨를 쳤다.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에서 보내고 있지만 박성철과 강은영 사이의 일들을 어르신이 모를 리가 만무했다. 어르신은 증손자만 아니라면 당장 다리를 분질러서 내쫓고 싶은 심정이었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강은영이 집에 들어섰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긴장감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박성철은 고통을 참으며 강은영에게 말했다. “은영아, 어서 도망쳐.” 다정한 호칭에 모두의 시선이 강은영에게로 쏠렸다. 박강우는 박성철과 강은영이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때부터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강은영도 그의 기분을 느끼고 얼른 시선을 거두고는 종종걸음으로 박강우에게 달려갔다. 박성철은 다친 어깨를 붙잡고 강은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오늘 일은 내가 처리할게. 넌 일단 돌아가….” 강은영은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박강우만 바라봤다. 곧이어 그녀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거실에서 울렸다. “여보, 내가 좀 늦었지? 괜찮아?” 박성철은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강은영이 날 무시해? 왜?’ 그는 조금 전 통화에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던 그녀의 말이 떠올라서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강은영은 오로지 박강우만 보인다는 듯이 그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상처 많이 아파? 나 선생님 지금 부를까?” 박강우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 비서는?” 강은영은 풀어헤친 그의 셔츠 단추를 다시 채워주며 말했다. “내가 당신 찾으러 온다니까 안 된다고 해서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어.” “당신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 박강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때, 등 뒤에서 어르신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으면 이혼 서류에 사인이나 하고 가거라! 나 집사!” “네, 어르신. 지금 가져올게요.” 강은영은 그제야 박강우 뿐이 아니라 본가 가족들도 미리 이혼 서류를 준비해 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강우는 음침하게 굳은 표정으로 어르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강은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 어머님.” 순간 어르신과 이예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강은영이 이렇게 살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부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르신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강은영을 보며 말했다. “너한테 할머니 소리는 이제 듣고 싶지 않다!” “할머니, 이만 화 푸세요.” 강은영은 다가가서 강설아에게서 빼앗은 박스를 내밀었다. 어르신의 의아한 시선 속에 그녀는 박스를 할머니에게 쥐여주며 말했다. “생신이 코앞인데 입 발린 말에 속아 이런 귀한 걸 덜컥 남에게 주면 어떡해요?”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내가 눈이 나빠서 거짓말에 속았다는 거니?”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어르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은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이 귀한 다이아몬드를 그런 여우한테 줄 수 있어요?” 현장에 있던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은영을 바라봤다. 드디어 미친 건가? 어르신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이나 지껄이다니! 하지만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예란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강은영은 사랑스럽고 활발한 아이였다. 어르신이 퍼렇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오늘 당장 이혼 서류에 사인해!” 이예란은 저도 모르게 말리려고 다가갔다. 강은영은 애교스럽게 어르신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그건 안 돼요, 할머니. 제가 강우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어르신은 그런 그녀를 힘껏 노려보며 말했다. “이혼 안 하면, 남편 죽이려고 하는 너를 계속 옆에 끼고 살라고?” “날 다치게 한 사람이 은영이라고 누가 그래요?” 이때, 박강우가 앞으로 나서며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 강은영은 고개를 돌려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감싸려는 남자의 배려가 그녀는 너무 고마웠다. 그녀는 줄곧 솔직하고 자기가 한 일은 과감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강우를 찌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가족들 앞에서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모든 잘못은 강설아에게 밀어야 했다. ‘강설아, 네가 먼저 잘못을 했으니 날 너무 원망하지 마.’ 어르신은 눈을 크게 뜨고 박강우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설아한테 다 들었는데 지금도 얘를 감싸는 거니?” “그 여자가 이런 식으로 가족들 앞에서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거였군요.” 박강우가 차갑게 말했다. 강은영도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요, 할머니. 강설아가 그런 말까지 했어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니?” 앞으로 다가선 이예란이 박강우에게 물었다. 박강우는 재빨리 강은영에게 눈빛을 보냈다. 신호를 받은 강은영은 어르신의 팔짱을 꼭 끼며 불쌍한 표정으로 이예란을 바라봤다. 이예란은 강은영을 10년이나 키워준 사람이었다. 강은영이 박강우를 다치게 했다면 용서할 수 없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그래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은영이 네가 말해봐.” 어르신이 강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은영은 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게… 말씀드리기가 참 곤란해요.” 박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연기를 잘했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박성철이 앞으로 나서려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박강우의 예리한 눈총이 쏟아지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강은영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어서 말해보라니까.” 어르신이 그녀를 재촉했다. 강은영은 뭔가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사실 얼마전에 언니가 줄곧 저를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거 때문에 언니를 불러서 따지려고 했는데 언니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저한테 달려드는 거예요.” “설아가?” 어르신은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다. 모두가 아는 강설아는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지만 우아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었다. “맞아요. 저도 그럴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언니가 과도로 저를 찌르려고 했는데 마침 그때 강우 씨가 돌아와서 저를 구해준 거예요.” 강은영은 대놓고 강설아가 찔렀다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잘못을 강설아에게 돌렸다. 말을 마친 그녀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어르신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계속했다. “그래서 설아가 너한테 뭘 속였다는 거니?” “저한테 잘해주고 접근한 이유가 강우 씨를 꼬시려던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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