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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박강우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은영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여… 여보, 나한테 5분만 줘. 내가 깔끔하게 처리할게.” “핸드폰 이리 줘, 강은영.” 박강우의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위압감이 느껴졌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내가 잘 처리할게. 믿어줘.” 안 그래도 시간을 내서 다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박강우의 부상을 신경 쓰느라 잊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지금 그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박강우는 말없이 손을 내밀고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강은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핸드폰을 그에게 건넸다. “그… 그럼 화내지 마. 나한테는 이제 당신밖에 없어.” 말을 마친 그녀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박강우는 번호를 확인하고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눈을 감고 있는 강은영마저 점점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보니 박강우는 싸늘하게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여보, 그 인간의 흔적을 진작에 지웠어야 했는데 내가 미안해. 하지만 당신을 향한 마음은 진심이야.” “이거 놔.” 박강우의 목소리는 무섭게도 침착하고 싸늘했다. 지난 생이나 지금이나 박성철 얘기만 나오면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싫어.” 강은영은 그의 탄탄한 허리를 꽉 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손을 놓으면 영영 그를 잃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여보….” 박강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억지로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 강은영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들고 박강우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어떻게 해명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눈치 없는 박성철이 또 전화를 걸어왔다. 강은영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강우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은영은 지금 당장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박성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영아.” 강은영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역시 강설아의 단짝이라서 그런지 그렇게 욕을 퍼부었는데도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려주고 싶었다. 박강우는 음울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입을 열었다. “나야.” 강은영은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당장 폭발할 화산 옆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박성철은 박강우의 목소리를 듣자 순간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태도를 바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우 삼촌.” “내가 네 삼촌인 건 기억하고 있었네? 버릇없이 내 와이프 이름을 부르길래 모르는 줄 알았지.” 박성철은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곧 아니게 되겠죠. 삼촌, 잊었어요? 애초에 삼촌이 강제적으로 한 결혼이잖아요.” ‘지금 당장 달려가서 저 입을 찢어버릴까?’ 강은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박성철의 역겨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은영이는 줄곧 삼촌 떠나고 싶어했어요. 내가 돌아온 것도 은영이를 데려가기….” “박성철, 당장 그 입 안 다물어? 너랑 강설아가 뒤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지 정말 모를 것 같아?” 박성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은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방해만 없으면 천천히 박강우와 무너진 신뢰를 복구할 생각이었는데 강설아와 박성철이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어찌 화가 안 날 수 있겠는가. 거실에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강은영은 박강우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종료버튼을 누른 뒤에 그가 보는 앞에서 박성철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 “여보, 이 인간 얘기 믿지 마.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그녀는 나중에 박성철을 찾아가서 제대로 밟아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박강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조금씩 쌓이고 있던 신뢰가 박성철이 끼어들면서 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강은영, 그 말 진심이어야 할 거야.” “만약 거짓말이면 난 벼락 맞아 죽을 거야!” 박강우는 단호한 표정으로 독한 맹세를 하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그런 말을 해?” 남자의 긴장한 표정에 그녀는 살포시 웃어버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그럼 화 풀어.” 지난 생에 그를 떠난 벌로 목숨을 잃었으니 아예 빈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박강우의 진심을 저버린 자신이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죄없는 박강우마저 끌어들여 목숨을 잃게 만든 것 같아서 후회가 밀려왔다. 강은영이 거듭 사과한 끝에 해프닝은 겨우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박강우는 식탁에 마주앉자마자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접시에 챙겨주었다. “저녁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살쪄.” “살이 찌면 얼마나 찐다고.” 박강우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가녀린 그녀의 허리를 바라봤다. 강은영은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집에서 놀고 먹는 게으름뱅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 박강우의 핸드폰이 울리고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본가의 전화임을 확인한 강은영이 말했다. “받아. 할머니 생신잔치 때문에 전화한 걸 수도 있잖아.” 박강우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받아.” 강은영이 말했다. 그녀 때문에 박강우는 본가 식구들과 사이가 점점 멀어져서 거의 걸음을 안 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하지만 박강우가 가족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강은영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박성철은 할머니 손에 있는 지분을 노리고 돌아왔을 테니 더 이상 박강우가 가족들과 멀어지게 둘 수 없었다. 지난 생에서는 그녀와 박강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대는 바람에 박성철이 기회를 틈타 할머니의 신뢰를 얻고 지분을 챙겨간 일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뒤로 박성철은 뒤에서 몰래 부현그룹 지분을 매수하기 시작했고 주주총회에서 박강우는 무방비 상태로 대표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게 막을 것이다. 박강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영이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수화기 너머로 시어머니 이예란의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강우는 강은영의 눈치를 살폈다. 본가에서 그녀와 박강우를 같이 초대한 일은 극히 드물었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예란은 계속해서 말했다. “할머니가 너희 두 시간이나 기다리고 계셔.” 무슨 일인지 말은 안 해도 어머니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명확했다. “알겠어요.” 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고 강은영에게 말했다. “일단 먹고 있어. 난 본가에 좀 다녀올게.” 강은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머님이 나랑 같이 오라고 하지 않았어?” 어머님 소리에 박강우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 그녀가 어머니를 이렇게 살갑게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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