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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적당히 불쌍한 척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쳐다보면 웬만한 남자는 측은지심에라도 모질게 못하지만 박강우는 달랐다. “진 비서.” “여보, 일단 안으로 들어가. 여긴 내가 정리할게.” 박강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은영이 그를 말렸다. 지난 생에 강설아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속였는지, 그들 일가가 그녀를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는지 모두 갚아주고 싶었다. 박강우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빨리 정리하고 들어와. 나 배고파.” 입장을 분명히 하는 그의 말에 강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강은영은 그런 강설아를 힘껏 노려보고는 박강우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가.” 박강우는 경고의 의미로 강설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뒤돌아섰다. 조금 전 강은영을 대하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강설아는 남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매정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다가가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려 했다. “악!” 순간 처참한 비명소리가 별장 안팎에 울려퍼졌다. 강은영이 다리를 뻗어 그녀의 손목을 밟아버린 것이다. 박강우를 향해 내밀었던 손은 그대로 짓밟혀서 땅에 처박혔고 참기 힘든 고통에 강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진기웅과 진부성마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대표님에게만 잔인한 줄 알았는데 가족들에게 언제부터 저렇게 폭력적으로 변한 거지?’ 하지만 예전에 그들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통쾌한 건 사실었다. “이거 놔!” 박강우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자 강설아는 음침한 얼굴로 강은영을 뿌리치려 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강설아는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강은영을 보고 있었고 강은영은 그런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뭐야? 이제 착한 언니 가면은 포기하기로 한 거야?” 강설아는 힘겹게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강은영, 강영물산이 망해서 너한테 이득 될 게 뭐가 있어? 친정이 망하면 시댁에서 널 예뻐해 줄 것 같아? 무시하면 무시했지!” “어차피 강설아 네 이간질 때문에 강영물산 건재해도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널렸는걸?” 순간 강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멍청이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어떻게? 설마 박강우가….’ 박강우의 싸늘한 태도와 강영물산을 궁지로 몰아넣은 부현그룹의 움직임을 생각하니 강설아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가서 강준형 회장한테 전해. 강영물산 살리고 싶으면….” 갑자기 말끝을 흐린 강설아를 향해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강설아는 순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강은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강영물산 살리고 싶으면 제일 아끼는 딸을 호적에서 제명하라고 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금 날 집에서 내쫓으라고 말한 건가? 강은영 네가 뭔데?’ 강은영은 싸늘한 얼굴로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너랑 강영물산, 강준형 회장은 하나만 살릴 수 있어.” 강설아는 순간 치미는 분노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는 멀어지는 강은영의 등 뒤에 대고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꿈 깨! 강영물산은 내 거야! 아빠가 나한테 물려준다고 했다고!” 드디어 여우가 흉측한 가면을 벗어던진 것이다. 강은영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물려받아봐야 빈 껍데기겠지만.” “뭐라고?” 강영물산을 완전히 망하게 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아니야! 강은영에게 그런 대단한 재주가 있을 리 없지! 박강우랑 몇 년이나 싸워댔으니 박강우가 이런 것까지 도와줄 리는 없어!’ 강설아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안으로 들어간 강은영은 식탁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박강우를 보고는 바로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와! 오늘은 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네?” 박강우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 전에 그녀가 강설아에게 한 말을 전부 들었던 그였다. “여보, 나 새우 먹고 싶어. 껍질 발라줘.” 강은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를 제기했다. 안으로 들어오던 진기웅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알던 강은영이 맞나 싶었다. 저렇게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요구를 제기하면 뿌리칠 남자가 어디 있을까? 어제부터 오늘까지 진기웅과 진부성은 강은영을 면밀히 주시했지만 그녀에게서 어떤 거짓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강우는 당연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새우를 발라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강은영은 그의 손을 잡고 손에 있는 새우를 그대로 입에 넣었다.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 옆에서 지켜보던 전 집사는 부부 금슬이 너무 좋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한편, 모태솔로인 진기웅은 눈꼴 사나운 그 모습을 보고 씩씩거리며 서재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면서도 만약 이 모든 것이 상사를 홀리기 위한 강은영의 연극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맛있다. 여보, 장조림도 맛있어.” 그러면서 그녀는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박강우의 입에 넣어주었다. 박강우는 순간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그제야 그가 소고기를 안 좋아한다는 것이 떠올라 얼른 자신의 입에 집어넣고 다른 반찬을 챙겨주었다. 박강우는 자신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강은영은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를 보며 지난 생에는 왜 이렇게 잘생기고 완벽한 남자를 거부했을까 후회했다. 하지만 이내 부정적인 감정은 속에 감추고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때? 맛있지?” “응, 맛있네.” 박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어 가녀린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강은영은 박강우의 무릎에 앉아 상처에 안 닿게 조심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러지 마. 사람들 다 보잖아.”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조금 전까지 자리를 지키던 전 집사와 고용인들, 그리고 진기웅, 진부성까지 모두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당황한 강은영은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 “일단 이거 놓고 밥부터 먹어.” 하지만 남자는 요지부동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착 달라붙어서 식사를 끝냈다. 박강우는 오후에 회사에 나가지 않았기에 오찬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잠깐의 산책 시간을 가졌다. 낮잠을 자기 전에 강은영은 그를 도와 붕대를 갈아주었다. 침대에 누운 강은영은 남자의 뜨거운 열기에 바짝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었다. 등 뒤에서 남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몸을 움직였다. “왜? 잠이 안 와?” 내려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마자 눈을 뜬 박강우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은영은 화들짝 놀라 얼른 눈을 감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 잠들었어!” 부상 정도가 심각했기에 지금은 다른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박강우는 놀란 토끼처럼 자신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아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교활한 토끼 같으니라고.”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한 뒤, 눈을 감았다. 단잠에 빠진 두 사람은 해가 저물 무렵에야 눈을 떴다. 핸드폰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박성철의 전용 번호임을 확인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쩌자고 그와 엮여서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겼던 것일까. 박강우가 몸을 일으킨 순간, 강은영은 재빨리 통화거부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남자의 싸늘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사람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한 그의 앞에서 무언가를 숨길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빨리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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