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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하채원은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돈을 냈으니까 물건은 제가 가져갈게요.” 육태준은 수표를 쥐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지켜봐.” ... 나인원. 하채원은 돌아온 후 베란다에 서서 술을 한 잔 또 한 잔 마셨다. 예전에는 술을 마시는 습관이 없었는데 출국 후부터는 혼자 감당하기 힘들 때마다 알코올로 자신을 마비시키곤 했다. 두 아이가 태어난 후 아이들이 곁에 있다는 이유로 서서히 이 나쁜 습관을 바꾸었지만 오늘 육태준을 만난 후 하채원은 또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기억상실증에 관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출국 후, 그 동안 그녀는 신체적 부담이 매우 컸다. 우울증에 임신까지 겹쳐 기억력이 감퇴해서 장옥자마저 간헐적으로 잊어버리곤 했다. 그동안 그녀는 매우 고통스러웠고 의식이 한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한때는 학창시절로, 한때는 육태준과 결혼하던 때로 돌아갔다. 그중 한 번은 육태준과 이혼한 것도 잊고 가짜 죽음으로 출국한 것도 잊은 채 두 사람이 막 결혼한 것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귀국 비행기를 사서 육태준을 찾아가려 했다. 그날, 그녀는 하마터면 단현시로 돌아갈 뻔했지만 다행히 공항에 있을 때 육태준과 배다은이 함께 파티에 참석하는 사진을 보고 뒤늦게 두 사람이 끝났다는 것을 기억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라는 것은 희망 뒤에 따르는 실망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었다. 육태준이 줄곧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4년 동안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 단지 오기와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억을 잃은 척하면서 생리적인 접촉이 아닌 방법으로 육태준의 정자를 얻으려고 했다. 전화벨이 울리며 하채원의 생각을 끊었다. 하채원이 전화를 받자 차지욱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됐어?” “응, 첫걸음이 성공한 셈이야.” 하채원이 대답했다. 차지욱은 그녀의 말소리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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