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나는 삿대질하는 그녀의 손을 밀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집안의 AI 도어락은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다. 지금 화면에는 박서아가 5분 전에 금방 집에 왔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작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왔을 뿐인데 집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고? 나를?!
또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고 사과하길 바라는 거겠지.
나는 막무가내인 그녀를 거들떠보기도 귀찮았다.
“그러는 넌? 마음속에 아직 이 가정이 있긴 해?”
아니나 다를까 박서아는 머리를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새로운 게임 카드를 내게 건넸다.
“매장을 싹 다 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사 왔어. 이제 됐지?”
말투까지 나긋해진 걸 보니 내게 칭찬을 구걸하며 분위기를 풀어나가려는 듯싶었다.
다만 내 시선은 게임 카트리지에 꽂혔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게임 카드는 전부 한정판이라 앞다투어 사기도 힘든데 오프라인 매장에서 싹 다 구해왔다는 게 말이 될까?
다른 사람에게 받은 게 뻔했다.
상대가 누군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휴대폰을 열자 최이준의 피드가 하나 올라왔다.
한정판 애니메이션 피규어에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까지 추가한 내용이었다.
[먼지 쌓인 쓰레기로 바꾼 아이템. 고마워, 마이 도라에몽 베이비.]
순간 나는 실소가 터지고 눈가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이젠 모든 게 무의미한 노릇이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을 꾹 삼키고 게임 카드를 싹 다 휴지통에 버렸다.
“쓰레기 따위 필요 없으니까 다 버려.”
이때 버럭 화난 박서아가 나의 뺨을 후려쳤다.
“야 구민기!! 내가 이 카드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네가 뭔데 마음대로 버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 물건 버리냐고?!”
“X발, 이제 그만 솔직해져 보시지! 페라리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그렇지만 민기야, 이 회사는 내 이름으로 되어있어. 너 따위가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어. 제 분수는 잊지 말아야지, 안 그래?”
“최고 매출을 달성한 팀원에게 보너스를 주는 건 일종의 회사 경영 모드야. 이런 자잘한 일까지 너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알아듣겠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박서아 때문에 머리가 찢어질 것 같지만 여자에게 손을 대는 습관이 없었던지라 막무가내인 그녀를 밀치며 분노를 꾹 참았다.
나는 속절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직원들 어떻게 보상하든 나랑 아무 연관 없어.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네 회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서아가 대뜸 내 휴대폰을 뺏어가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제발 그만해! 몇 번을 얘기해? 내 일에 신경 끄라고! 우린 결혼했지만 넌 내게 간섭할 자격 없어!!”
“종일 밤새우더니 지금 네 꼴 좀 봐. 몇 년만 더 지나면 대머리에 배 불뚝이 아저씨가 다 되겠어. 꾸준히 몸 관리하는 이준이랑 너무 비교되잖아. 지긋지긋해, 정말.”
나도 끝내 한심해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한때 학교 농구부 주장이었던 나는 완벽한 근육질 몸매를 지녔었다. 그게 아니면 박서아도 나랑 결혼할 일이 없었겠지.
하지만 산처럼 쌓인 데이터와 줄지은 야근 때문에 항상 밤을 지새우다 보니 에너지가 말끔하게 소진되고 말았다.
영업사원인 최이준이 뛰라는 영업은 안 뛰고 무슨 여유가 나서 매일 헬스장에 다닐까? 박서아는 정말 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걸까?
이전의 나는 묵묵히 헌신하기만 하면 그녀가 틀림없이 나의 노고를 알아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스스로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사랑이란 비천하게 애원하고 구걸하는 게 아니었고 결혼이란 일방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었다.
심신이 피로한 나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마음대로 생각해. 이젠 회사 안 나가.”
박서아는 나를 쫓아온 게 아니라 거실에서 잡히는 대로 물건을 마구 바닥에 내팽개쳤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후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거실에 또다시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짐 정리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서려 할 때, 박서아는 대뜸 웃음을 멈추고 날 선 눈빛으로 나를 째려봤다.
“말다툼 좀 했다고 집 나가는 거야?!”
“그래, 가봐 이 느끼한 아저씨야. 종일 꾸미지도 않고, 눈 밑에 다크서클 좀 봐. 역겨워죽겠어. 내가 잡을 거라고 생각해? 꿈 깨! 꺼지겠으면 당장 눈앞에서 꺼져!”
“나 다시 돌아오라고 빌지나 마!”
나는 문을 쾅 닫고 나왔다. 안에서는 그녀의 욕설이 계속 울려 퍼졌다.
사실 나는 극심한 불안 장애를 겪어서 이전에 박서아가 집에 안 돌아오면 줄곧 불면증에 시달리고 미친 듯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른 돌아와달라고, 그녀가 있어야 마음 편히 잠들 수 있다고 비천하게 애원했었다.
다만 이젠 호텔의 킹사이즈 침대에 편하게 누워있다.
그녀가 없으니 오히려 너무 홀가분하고 평온해졌다.
정신과 의사가 말하길 나의 이런 애착 관계는 썩어 문드러지는 종양과도 같다고 했다.
떼어내지 않으면 끊임없이 침식할 테지만 모질게 떼어낸 순간 짜릿한 고통과 함께 새로운 몸을 얻을 거라고 했다.
밤새 달콤한 꿈을 꾸며 푹 잤더니 여느 때보다 머리가 맑고 개운했다.
나는 사직서를 직접 제출한 뒤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박서아한테서 온 메시지가 수두룩했다. 어젯밤에 클럽에서 노는 영상이었는데 최이준도 당당하게 옆에 있었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채 아물지 않은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힘겹게 다잡은 내 마음을 와르르 짓부숴버린다.
다만 이젠 전혀 먹히지 않는다.
나는 유유자적하게 아침을 먹으며 그녀가 새로 보낸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 박서아는 단정하게 오피스룩을 차려입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외 지사 설립 및 상장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최이준이 고급스러운 정장 차림에 그녀 옆에 서서 회사 대표인 척을 하고 있었다.
그건 원래 내 자리였으나 필요치 않아서 거절했다.
내가 버린 물건은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손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