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대체 자신의 손자를 얼마나 못 믿는 거란 말인가!
그 광경에 고남연도 윤북진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말했다.
“법률 대리인 일은 정말 고마워, 얼른 먹어.”
윤북진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고남연은 눈꼬리를 한껏 휘며 배시시 웃었다.
법률 대리인 계약을 체결하게 돼서 그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때, 진해영이 분위기를 굳히려는 듯 말했다.
“북진아, 남연아.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오늘 밤에는 자고 가지 그래.”
“여기 본가는 자리가 좋아서 오늘 밤에 여기서 자면 바로 아이가 들어설지도 몰라.”
이내 할머니는 한마디 덧붙였다.
“북진아, 이따까 좀 더 힘을 써서, 쌍둥이도 한 번 노려봐.”
윤북진은 할 말을 잃었다. 결국에는 가족 모두가 두 사람이 얼른 아이를 가지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위층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고남연은 곧바로 물었다.
“애 가질 거야?”
윤북진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고남연,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없는 거야?”
고남연은 우습다는 듯 말했다.
“너랑 이 생각 안 하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 이런 생각을 한다면, 좋겠어?”
윤북진이 훅 다가가더니 그녀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정말 부끄러움이라곤 없나 보군.”
고남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목을 감싸안았다.
“너는 내 남편인데 그런 가식은 왜 떨어야 해?”
그녀에게 있어 아이는 체면 같은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게다가 윤북진의 앞에서 그녀는 이미 모든 이미지가 다 바닥이 나 있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윤북진이 입을 열었다.
“고남연, 너 같은 여자는 없을 거야.”
“허튼소리.”
고남연이 말했다.
“난 그런 여자가 아니야.”
말을 마친 그녀는 까치발을 들며 입술이 거의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갔다.
“윤북진.”
“응?”
윤북진의 대답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광경에 고남연은 곧바로 입을 맞췄다.
고남연의 부드러운 입술에 윤북진은 심장이 저릿해져 양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밀쳐내려던 그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작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조금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몸에서 열기가 휘몰아칠 때쯤, 고남연의 속내와 그의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목적을 단박에 알아챘다.
그리하여 그는 고남연을 밀친 뒤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또 그렇게 직전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순간, 고남연은 멘탈이 나갈 것만 같아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화장실 쪽으로 내던졌다.
“윤북진,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화장실에 가서 혼자 해결할지언정 자신을 건드리지 않으려 하다니, 고남연은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만 같았다.
한참이 지나 윤북진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고남연은 이미 그를 등진 채 누워있었다.
윤북진이 고남연에게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앉으려는데 갑자기 등을 돌린 고남연이 그를 향해 발길질했다. 방심하고 있던 윤북진은 그대로 고남연의 발길질에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고남연.”
윤북진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고 고남연은 여전히 등을 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 밀려난 윤북진은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화가 난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옆에 앉으려고 하자 고남연은 다시 그를 발로 차려고 했고 윤북진은 바로 다리를 들어 고남연을 깔아버렸다. 그러자 고남연은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가 없었다.
윤북진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자 고남연은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일어났다.
“그래, 내가 갈게. 그럼 되지?”
방금 전의 윤북진의 행위를 고남연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서럽고 모욕적인 아내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윤북진은 고남연의 말에 곧바로 정색했다.
“고남연, 다 늦은 밤에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적당히 해?
고남연은 별안간 서러움이 밀려와 눈시울을 붉히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윤북진, 정말로 못살 것 같으면 네가 가서 아버님에게 제대로 설명했다.
2년이었다. 이런 냉대와 독수공방을 그녀는 더는 견디고 싶지 않았다.
안되면 하루빨리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가지든 말든 엄마가 되든말든 그다지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옷장으로 가 외출복을 챙겼다.
고남연이 진짜로 나가려 하는 것을 본 윤북진은 얼른 가서 그녀를 잡았지만 고남연은 그를 뿌리쳤고, 윤북진은 있는 힘껏 그녀를 침대로 밀쳤다.
고남연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윤북진은 아예 그녀를 밑으로 깔며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남연, 일 너무 크게 만들지 말지 그래.”
조금 전까지 화목한 모습을 보여줘 놓고 지금은 또 아예 박차고 나간다면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눈시울이 붉어진 고남연은 고개를 휙 돌려 윤북진을 보지 않았다.
윤북진은 가슴이 저릿해져 몸을 숙인 채 입을 맞추려 했지만 고남연은 고개를 더 밑으로 아예 베개에 파묻어버렸다.
지금 그녀는 내키지 않았고 윤북진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윤북진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오기 전에 약속했잖아.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가겠다고.”
결혼 2년 동안 윤북진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숙이고 들어왔고 처음으로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고남연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기에 윤북진은 그녀를 안은 채 잠들었다.
고남연은 여전히 그를 등진 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윤북진이 보인 태도는 그의 가족들의 기분을 생각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북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침대에 기어오르기나 하는 천박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러니 결혼하고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굴어도 여전히 자신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날 밤, 고남연은 밤을 새웠다.
하지만 그녀를 안고 잠든 윤북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잠들었다.
다만 잠에서 깼을 때, 옆자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고남연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본 윤북진은 어젯밤 그녀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끝내는 건들지도 못하게 한 채 내내 등을 지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그는 속이 영 말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뭘 하든, 아무리 화를 내도 그녀는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아직 출근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고남연은 아침 일찍 변호사 사무실로 와 윤정 그룹의 계약서를 준비해 뒀다.
윤해천이 미리 이야기를 해둔 탓에 윤정 그룹으로 간 그녀는 윤북진이 아니라 곧바로 법률팀과 계약을 체결했다.
하정준이 윤북진에게 그 일을 보고했을 때 윤북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졋다.
일이 없을 때는 그녀는 그를 찾지도 않았다.
신인이 윤정 그룹의 법률 대리인 계약을 체결한 탓에 고남연은 순식간에 업계에서 작지 않은 소란이 일었다.
사무소의 그 누구도 고남연이 계약을 체결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그저 한번 시도해 보라고 보냈는데 고남연이 이렇게 빨리해 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고남연의 주임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날 밤에 사무소의 모두를 불러 축하 자리를 만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주임은 환한 얼굴로 고남연에게 술을 따라줬다.
“남연아, 정말 대단해. 아주 놀라워!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해내지 못한걸. 단박에 해냈을 줄이야.”
“넌 내가 첫눈에 보자마자 미래가 아주 밝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 첫 잔은 너한테 먼저 줄게.”
고마연은 술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찬이십니다, 주임님.”
주임이 단번에 술을 들이켜자 고남연도 눈치껏 원샷했다.
“남연 씨, 제가 한 잔 올릴게요.”
“남연 씨….”
로얄 빌리지 1번가.
서재.
윤북진이 간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고남연은 지금 이 시간이 되도록 아직도 집에 오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 그는 고남연이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자, 표정이 더더욱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