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지서훈이 손가락을 움직여봤지만 너무 아팠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끝도 없이 솟구쳐 올라오던 짜증과 피에 대한 갈망이 사그라든 것 같았다.
서서히 눈을 뜬 지서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설인아를 바라봤다. 고작 침 몇 방에 이렇게 나아진다는 게 너무 믿기지 않았다.
전에 다른 한의사도 찾아봤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지서훈은 명의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만나보기 전부터 거부감을 드러냈다.
설인아의 눈빛을 느낀 지서훈이 마른기침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나아졌어.”
설인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 지나서야 지서훈 몸에 꽂았던 은침을 하나씩 뺐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지서훈은 마치 금방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폭삭 젖었고 끈적거려 너무 불편했다.
지서훈의 생각을 읽어낸 설인아가 이렇게 말했다.
“일단 샤워하면 안 돼. 운동해서도 안 되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담백한 음식부터 먹어. 많이 먹으면 안 되고 딱 세입까지만.”
지서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대에 몸을 기댔다. 이렇게 홀가분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라 설인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다소 부자연스러웠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설인아는 이 말을 듣고도 그저 눈썹만 추켜세울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할 줄도 아네.’
설인아가 은침을 거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병실 문이 열리자 지영수와 성주원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어때요?”
지영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설인아를 바라봤다. 설인아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는데 익숙한 그림자 두 개가 보였다. 육진수와 설연우였다.
‘아직도 안 가고 버틴 거야? 무슨 낯짝으로 저러지?’
설인아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내색하지 않고 지영수에게 말했다.
“일단은 억제했지만 치료는 계속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퇴원하고 집에서 몸조리하면서 3일에 한 번씩 침 맞고 제가 준 처방으로 약을 달여서 마시면 됩니다.”
흥분한 지영수가 설인아를 보며 말했다.
“그 뜻인즉...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요?”
설인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원이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영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당연하죠. 신의라는 타이틀이 그저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성주원이 자신감 넘치게 말했지만 양진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성주원을 바라봤다. 아무리 업계에 성주원을 만나려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지영수의 어깨를 툭툭 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 없었다.
‘젊은이가 간땡이가 불었네.’
하지만 지영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신의님,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제가 어떻게든 보답할게요. 하늘의 별이라도 따 드리겠습니다.”
지영수는 지금까지 지서훈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대량의 자금과 정력을 투여해 전 세계의 명의를 찾아다녔다. 잠시적인 억제라 하더라도 지영수에겐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전에 찾은 명의들은 잠시 억제하는 것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청난이 나서면 고치지 못할 병이 없었기에 성주원의 표정은 자신감으로 차 넘쳤다. 청난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설연우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언니,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그러다 도련님에게 무슨 일 생기면 그때 가서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설인아는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설연주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연우는 그런 설인아를 보고 겁먹었다고 생각해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얼른 아저씨한테 사과해. 그러면 너그럽게 용서해 줄지도 몰라.”
육진수가 한숨을 내쉬더니 앞으로 나서며 설명했다.
“인아야. 아직 서훈이 상태 어떤지 보지도 못했는데 함부로 얘기하지 마. 그러다 서훈이 골든 타임 놓치면 책임질 수 있어?”
육진수는 설인아가 병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전공으로 배운 적도 없는데 복잡한 지서훈의 병을 고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착하지. 이제 억지 그만 부리고 아저씨한테 사과해.”
“그리고 앞으로 거짓말하지 말고.”
육진수는 설인아 때문에 계획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성주원은 육진수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라 얼른 앞으로 다가가 육진수를 밀어냈다.
“도대체 누군데 이래? 무슨 자격으로 인아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데?”
이 멍청한 자식만 아니면 청난이 2년이나 자취를 감출 일도 없었다. 어렵게 다시 복귀했는데 아직도 여기서 개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펄쩍 뛸 만도 했다. 청난이 좋아한 사람만 아니었어도 성주원은 진작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인아가 누군지 알아?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그 청난이 바로 인아야.”
“그런데 어디서 손가락질이야?”
청난이라는 이름이 의료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지 육진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청난은 거의 업계에서 신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청난...’
이 두 글자가 마치 우레처럼 육진수와 설연우의 마음에 꽂혔고 두 사람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난?”
육진수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승사자가 와도 싸워서 이긴다는 그 청난, 3년간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는 그 청난이 바로 설인아라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육진수도 장선행을 초대하기 전에 청난을 초대한 적이 있지만 성공하기는커녕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설연우는 옷자락을 거의 뜯어내다시피 주물럭거렸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니까 설인아가 그 청난이라는 거지? 지영수가 칭찬하는 그 신의? 아니야. 설인아가 그렇게 대단할 리 없어.’
설연우가 육진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애써 침착한 척했다.
“오빠, 언니 거짓말하는 거죠?”
성주원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뭐 콩트 하러 왔어? 두 사람 여기 남아있는 게 더 민폐 아닌가? 혹시 도련님이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길 바라는 거 아니지?”
이 말에 지영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육진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
설인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설인아에게로 쏠렸다.
“말 함부로 하는 게 뭔지 알긴 하네?”
설인아가 덤덤한 표정으로 육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오고 나서 지금까지 말을 함부로 한 사람은 그들이었고 막무가내로 사과하라고 한 사람도 그들인데 성주원이 맞는 말 좀 했다고 발끈하니 정말 너무 우스웠다.
성주원도 따라서 콧방귀를 뀌었다.
“도련님 낫게 하고 싶은 거면 왜 자꾸 청난을 막아서는 거야? 그것도 둘씩이나 와서 한마디씩 보태면서 말이야. 머리 쓰긴 썼네.”
설연우는 성주원이 몰아붙이자 육진수 뒤로 숨으며 육진수가 지켜주길 바랐다.
“오빠...”
설연우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육진수는 설연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고 그저 꼿꼿이 서 있는 설인아를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인아가 정말 신의 청난이라고?’
육진수는 눈앞에 선 설인아가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지영수는 성주원을 성주원 씨, 설인아를 신의라고 존칭했다. 게다가 지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절대 아무 의사나 찾을 리가 없었다. 지영수가 설인아를 대하는 태도에서 진작 알아채야 했는데 간과한 것이다.
화가 치밀어오른 육진수가 설인아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동안 왜 나 속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