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지서훈의 병은 피를 빨아먹는 병이라 공격성이 매우 높았는데 혼자 병실에 남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지영수가 한걸음 나서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의님, 한가지 설명해 드릴 게 있는데 우리 아들이 앓고 있는 병이 사실 아주 복잡합니다...”
성주원도 설인아의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맞아. 그러다 너를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아무리 의술이 대단하다 하지만 결국엔 연약한 여자였다.
설인아가 지서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젓더니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성주원이 타이르려는데 설인아가 손사래를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믿어.”
성주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청난이 한번 결정한 일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성주원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당부했다.
“그래. 혼자 조심해. 내가 문 앞에 있을 테니까 무슨 문제 있으면 바로 불러.”
성주원에게 청난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다. 설인아도 성주원이 걱정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지영수도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지서훈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꾹 참아. 절대 신의님 다치게 하면 안 돼.”
지영수는 시름을 놓지 못했고 성주원도 걱정되는지 여러 번 고개를 돌렸다.
문이 닫히고 설인아가 지서훈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지서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너도 나가.”
이마에 핏줄이 선 지서훈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뭔가를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그나마 괜찮은데 지금은 설인아 한 명만 남자 달콤한 피 냄새가 자꾸만 지서훈의 속을 긁고 있었다. 게다가 설인아의 목덜미가 어찌나 하얀지 볼 때마다 꽉 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했다.
설인아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옆에 있는 소파에 앉더니 덤덤한 눈빛으로 지서훈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네가 걸린 병은 나만 치료할 수 있어. 그래도 나갈까?”
“피에 대한 갈망을 컨트롤하기 힘들지? 자꾸만 짜증 나고 화나고 사람을 다치게까지 하잖아.”
“앞으로 식욕도 점점 떨어질 거고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 거야.”
지서훈이 그의 상황을 귀신같이 집어내는 설인아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지서훈은 확실히 수액으로 몸의 정상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차갑게 웃으며 비아냥댔다.
“우리 아빠한테서 들었지? 내가 무슨 수로 너를 믿어?”
설인아가 소파에 손을 올리더니 머리를 짚고 고개를 살짝 비튼 채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는 증상을 말해줄까?”
지서훈은 일개 여자인 설인아가 날고뛰어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다른 사람이 모르는 증상을 어떻게 알아.’
하지만 설인아가 내뱉은 말에 지서훈의 표정이 그대로 굳고 말았다.
“남자구실 못하지?”
설인아의 시선이 지서훈의 몸으로 향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지서훈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에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쪽팔려서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문제를 이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서훈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미간을 찌푸린 채 설인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설인아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정도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점점 몸이 저리면서 굳어갈 거예요.”
설인아가 덤덤하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서술하자 지서훈은 온몸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오늘 자꾸만 몸이 저릿했다가 말기를 반복해서 앉은 자세가 잘못됐나 했는데 돌이켜보니 예전에도 이런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설인아의 말대로라면 결국 폐인처럼 죽어간다는 의미였다. 아무렇지 않게 많은 증상을 짚어냈다는 건 설인아가 이 병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는 말 같았다.
지서훈이 심호흡했지만 기분이 점점 잡쳐갔다.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던 지서훈이 설인아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병을 정말 고칠 수 있다고?”
하지만 설인아가 고개를 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확신은 아니야. 일단 치료해 보는 수밖에.”
지서훈은 너무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웃음이 터졌다.
“너 개그하러 왔어?”
증상만 이것저것 늘어놓고 확신이 없다니, 이건 지서훈에 대한 모욕 같았다.
설인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매일 수액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 욕구를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을 거야. 내가 그 욕구를 완전히 억제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 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몰라. 치료하면서 네 몸 상태를 체크해봐야지.”
지서훈의 안색이 조금 풀리자 설인아가 한마디 덧붙였다.
“침을 며칠 맞으면 그런 증상이 사라지긴 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이 나았다고 거짓말은 안 해.”
지서훈이 멈칫하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설인아의 눈빛을 바라보더니 앙다물었던 입술을 뻐끔거리다 말았다. 설인아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침구술을 쓸 거야. 동의하면 지금 바로 시작하고.”
지서훈이 음침한 눈빛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짜증을 참아냈다. 이미 이 지경까지 왔는데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쁠 게 없었고 어차피 죽을 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는 게 오히려 승산이 더 클 것 같았다.
한참 망설이던 지서훈이 입을 열었다.
“그래.”
설인아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서훈의 손에 꽂혔던 수액 바늘을 빼고는 가방에서 푸른색 파우치를 꺼내 펼쳤다. 파우치는 장방형으로 된 두꺼운 천이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건 정연하게 정리된 여러 종류의 은침이었다. 창밖에서 비쳐 든 햇살이 은침을 비추자 침이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설인아가 파우치에서 세 치 정도 되는 은침을 뽑아서 손바닥에 쥐자 이불 위로 올려놓았던 지서훈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설인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댔다.
“바늘이 무서워?”
이 말에 지서훈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딱딱하게 말했다.
“누가 무섭대? 할 거면 얼른 해.”
설인아가 웃음기 어린 눈동자로 말했다.
“웃통 까.”
지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환자복을 벗어 던졌다. 마음속의 충동을 꾹꾹 참느라 그러는지 온몸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설인아가 손가락이 지서훈의 등을 스쳤다.
“일부러 참느라 하지 말고 힘 풀어. 눈 감고 심호흡하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지서훈의 몸이 오히려 더 딱딱하게 굳었다.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러운 설인아의 손이 살에 닿자 지서훈은 온몸이 저릿해 났다. 종래로 여자와 이렇게 살을 부딪친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혹시나 설인아가 보아낼까 봐 얼른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몸을 풀려 했다.
은침이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 지서훈이 신음했다. 저릿한 아픔이 살갗에서 뼈로 전해지자 지서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설인아는 의외로 잘 참는 지서훈을 보며 살짝 놀랐다. 은침을 찔러넣는 순간 아무리 몸이 무쇠라고 해도 소리를 지를 법도 한데 그저 연신 신음만 냈다.
‘쯧. 그래도 쓸만하네.’
설인아가 정신을 가다듬고자 침을 꽂아 넣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고 신음도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한 시간 후.
설인아가 동작을 멈추더니 뻣뻣해진 목을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다 지서훈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