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이렇게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니, 진작 알려줬으면 육진수가 장선행을 데려오느라 온갖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인아는 이제 와서 따지고 드는 육진수가 그저 우스웠다. 양진환이 지영수의 눈빛을 읽어내고는 얼른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
“육진수 씨, 진정해요. 청난 신의님이 얘기하지 않은 건 다 생각이 있어서겠죠.”
지영수가 성주원을 다독였다.
“성주원 씨도 화 풀어요.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요.”
설인아는 두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들어 지영수에게 말했다.
“회장님, 오늘 치료는 끝났으니 먼저 가볼게요.”
지영수가 얼른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신의님, 성주원 씨, 차 배정할게요.”
성주원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영수에겐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차 가지고 왔으니 다음 치료 때 뵙죠.”
지영수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요. 또 연락해요.”
그렇게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설인아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육진수는 두 사람이 코너로 사라지고 나서야 뒤따라갔다.
설연우가 큰소리로 육진수를 불렀다.
“오빠, 어디 가요.”
하지만 육진수는 설연우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설연우는 별수 없이 그 자리에 선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설인아, 이 빌어먹을 년.’
설인아만 아니었으면 설연우도 육진수에게 버려져 민망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설인아는 성주원과 나란히 서 있었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성주원은 그런 설인아를 보고 얼른 이렇게 다독였다.
“너도 화 풀어. 내가 있는 한 그것들이 다시는 난리 피우지 못하게 할 거야.”
설인아가 입꼬리를 당겼다.
“오늘은 어쩌다 마주친 거고 앞으로 지서훈 치료하면서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거야.”
성주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되물었다.
“지서훈 씨 상황은 어때?”
설인아가 변하는 숫자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치료할 수는 있는데 좀 복잡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성주원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설인아를 바라봤다.
“괜찮아. 치료할 수 있으면 된 거지.”
성주원이 한 손으로 엘리베이터를 짚으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내가 그랬지. 꼭 네가 나서야 한다고. 2년 동안 쉬었는데 나오자마자 이렇게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다니, 역시 청난은 청난이야.”
먼지에 가려진 진주가 드디어 햇살을 보는 날이 온 것이다.
설인아는 이에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다시 복귀한 건 사랑 따위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0년 동안 육진수를 사랑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일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주원은 설인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내려놓은 거 맞아?”
설인아는 성주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한 눈빛으로 성주원을 마주했다.
“당연하지.”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설인아가 정말 바보였다. 성주원은 덤덤한 설인아를 보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육진수 사랑한 거 후회해?”
설인아가 멈칫하더니 그녀를 걱정하는 성주원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일단 결정했으면 다시 돌아보지 않아. 함께 한 시간이 얼만데 한 번도 헤어지자고 한 적 없거든. 이번에 헤어지자고 했으니 절대 돌아보지 않을 거야.”
설인아도 이제 지쳤다.
성주원이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설인아를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는데 그녀가 더 이상 남자를 위해 속을 썩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 돌아보지 않는 거 좋다. 아까 두 사람 어떤 표정인지 봤어?”
성주원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표정? 나를 의심하거나 질책하는 표정이겠지.”
설인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성주원을 올려다봤다.
“그건 아니야.”
성주원이 흥분하며 말했다.
“나 아까부터 쭉 관찰하고 있었어. 네 신분이 밝혀진 순간 두 사람 다 넋을 잃더라. 특히 육진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게 잠깐 사이에 표정이 어찌나 바뀌는지, 신기하더라.”
설인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육진수가 설인아를 잘 대해주는 건 아니지만 대외적으로 쌓은 이미지가 있었고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대스타였기에 감정을 억제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성주원이 평소 말할 때 오버하는 습관이 없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성주원이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성주원은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흥분해 설인아에게로 바짝 다가왔는데 애티 나는 얼굴이 마치 수다쟁이 소녀와도 같았다.
“육진수가 너의 신분을 알았으니 엄청 후회하고 있을 거야. 너도 설씨 가문 딸인데 청난이라는 신분까지 더해졌으니 맨날 울면서 오빠, 오빠, 이렇게 애교나 부리는 설연우와는 비길 수가 없잖아.”
성주원은 소녀처럼 손을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설인아를 바라봤다. 오빠, 오빠라는 말이 나올 때는 일부러 목소리를 간드러지게 내기도 했다.
설인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려는데 성주원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봐봐.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꼭 재결합하자고 찾아온다니까.”
성주원이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헤벌쭉 웃으며 설인아를 바라봤다.
“만약 그놈이 진짜 그러잖아. 그러면 내가 포댓자루에 싸서 숲으로 끌고 가 혼내줄 거야.”
설인아가 다시 웃음을 터트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재결합할 일은 절대 없어.”
이미 결혼하기도 했고 결혼하지 않았다 해도 다시 돌아갈 일은 없었다. 사랑했으면 된 거다. 한창 사랑할 땐 한마음 한뜻으로 임했지만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 고개를 돌릴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도 예전에 해바라기처럼 따라다녔던 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육진수가 같이 자자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설인아는 아름다운 것들은 죄다 신혼 첫날에 남겨두고 싶었고 그래야만 아름다운 사랑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육진수가 바람을 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보면 육진수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는 사람이었지만 설인아는 너무 보수적이었다.
성주원이 이마를 가린 머리를 가지고 놀며 건들거렸다.
“다행이다. 아까 같이 서 있을 때 또 마음 약해져서 받아주는 줄 알았네.”
정말 그랬다면 성주원은 참지 못하고 그 개자식을 혼내줬을지 모른다. 육진수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했는데 이제 보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설인아와 함께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설인아가 눈꺼풀을 축 늘어트리며 슬픔을 감췄더니 다시 들어 올렸을 땐 이미 해탈했다는 표정이었다.
“뭐 미련 가질 것도 없는 사람이잖아.”
성주원이 그제야 시름 놓고는 팔꿈치로 설인아를 쿡쿡 찌르며 통쾌하게 웃었다.
“이래야 내가 아는 청난이지.”
정상에 서 있는 청난이 정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