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성주원이 설인아에게 주스 한잔 따라주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신 차렸다고? 이제 육진수 포기하기로 한 거야?”
“응.”
설인아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덤덤하게 대답했다.
육진수와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면 설인아가 묵묵히 희생한 시간도 10년이었다. 육진수가 오늘날의 성과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건 설인아의 공이 컸다.
대본 고르는 데는 설인아를 이길 사람이 없었기에 육진수는 작품을 고를 때마다 설인아에게 작품을 선별해달라고 했고 일단 선택했다고 하면 찍는 것마다 대박이 터졌다.
하지만 육진수는 종래로 그것이 설인아의 공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수많은 팬이 설인아를 욕할 때도 나서준 적이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성주원이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차버렸으면 된 거야. 한 번도 너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 없고 보호해 준 적 없잖아. 그게 사람이야?”
설인아가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다른 사람은 한눈에 보아낸 걸 나만 모르고 있었네.’
설인아는 이 화제를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아 정색하며 말했다.
“급하게 부른 이유가 뭐야? 무슨 일 있어?”
본론에 들어가자 성주원도 금방 진지해졌다.
“지씨 가문 작은 도련님 알지?”
설인아가 대답했다.
“하씨 가문 바로 아래 서열에 있는 지씨 가문?”
성주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지씨 가문의 지서훈 말이야.”
구미가 당긴 설인아가 얼른 되물었다.
“빨리 말해 봐.”
지씨 가문과 하씨 가문은 적대관계가 아니었고 줄곧 협력을 이어온 사이었다. 지금 지씨 가문을 돕는다면 그쪽에서도 도와준 은혜를 기억할 테니 좋은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성주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마른기침하더니 말했다.
“말하면 믿을지 모르겠는데 지서훈이 이상한 병에 걸렸대. 심하게 발작하면 피까지 마시는데 성격이 괴팍하고 쩍하면 화를 낸다더라고.”
설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피를 마신다고?”
“그래.”
성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속된 지는 좀 오래됐는데 원인이 뭔지 몰라. 그래서 상황이 점점 더 악화하고 있대.”
“네가 명성이 자자하니까 지씨 가문에서 연락한 것만 해도 수십번이 넘어.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한번 좀 봐줬으면 좋겠다면서.”
설인아가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병원부터 가보자.”
설인아가 나서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기에 성주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청난에게는 그럴만한 실력이 충분히 있었기에 성주원이 얼른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바로 준비할게.”
다급한 모습이 마치 설인아가 후회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에 설인아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진지함이 3초를 넘기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
한편, 까만 바이바흐 한 대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전석에 앉은 육진수가 핸들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게 보였다. 조수석에 앉은 설연우가 고개를 돌려 꿀 떨어지는 표정으로 잘생긴 육진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설연우는 육진수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전에는 설인아의 남자 친구라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략한 덕분에 육진수가 취한 틈을 타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설연우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수를 쓰든 오빠 눈에는 착하고 청순하게 보여야 해.’
오늘 육진수는 원래 처리할 일이 있었는데 설연우의 성화에 못 이겨 여기까지 데리러 왔다. 이 정도로 신경 쓰는 걸 봐서는 정말 이 남자의 마음속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제 설인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설연우는 승리의 희열을 감추며 육진수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오빠, 우리 언제쯤 도착해요?”
“아직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은데. 왜? 앉아 있기 힘들어?”
고개를 돌린 육진수가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설연우를 바라보자 설연우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운전 너무 오래 하면 힘들까 봐 그러지.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촬영하는데 마음이 아파서...”
설연우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키스하고 싶게 했다.
육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오빠가 그 정도로 약할 리가 있어?”
설연우가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는 웃으며 육진수를 바라봤다.
“오빠. 서훈 오빠 그런 병에 걸렸다는 거 알고 다들 지씨 가문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오빠만 이렇게 선뜻 보러 가는 거잖아. 역시 오빠는 의리가 있다니까.”
설연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육진수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서훈이 내 친구야.”
“내가 유명한 의사까지 섭외했어. 이따가 그 의사 데리고 가자.”
핸들을 잡은 육진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씨 가문과 협력하려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육진수만 알고 있었다. 지서훈이 정말 피를 먹는 괴물이라고 해도 말이다.
육진수를 바라보는 설연우의 눈빛이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이렇게 좋은 남자를 손에 넣었다는 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나와 손가락으로 육진수의 손을 매만지며 애교를 부렸다.
“오빠, 정말 너무 대단해요.”
육진수는 자기 손 위에 올려진 설연우의 손을 보며 눈빛이 흔들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연우 정말 요물이라니까.”
설연우가 얼굴을 붉히더니 육진수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 뭐야. 자꾸 이러면 나 오빠 미워할 거예요.”
육진수가 설연우의 손을 꼭 잡더니 가볍게 웃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왜? 싫어?”
설연우는 그저 수줍게 머리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 좋아요...”
차 안에서 육진수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한시간 후.
육진수가 설연우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동행한 사람 중엔 다른 사람도 보였다.
장선행, 이 사람은 국내에 이름을 알린 유명한 의사일뿐더러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지위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병실 앞에 도착했는데 문 앞에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지서훈의 아버지 지영수였고 다른 한 명은 지서훈의 비서 양진환이었다.
설연우가 얌전하게 육진수 뒤를 따랐다. 육진수를 조르면서까지 여기로 따라온 건 다른 가문의 사람도 알고 지내면서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지서훈의 안색은 딱 봐도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직이야? 얼마나 걸린대? 전화해 봤어?”
연신 시계를 확인하던 지영수가 양진환에게 묻자 양진환이 얼른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회장님, 이미 연락했습니다. 10분쯤이면 도착한다고 했습니다.”
지영수가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말했다.
“다행이네.”
그때 육진수가 설연우와 장선행을 데리고 나타나자 지영수와 양진환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육진수라고 합니다.”
지영수가 육진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씨 가문 둘째?”
육진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설연우는 자기소개에 급해하지 않고 얌전하게 옆에 서 있었다. 사실 설연우는 육진수가 먼저 그녀를 소개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데 정신이 팔린 육진수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바로 옆에 선 장선행을 소개했다.
“아저씨, 이분은 장선행 의사 선생님이에요.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는 의사라 고치기 어려운 병도 잘 고쳐요. 서훈이 꼭 잘 치료해 줄 거예요.”
하지만 지영수는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장선행을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선행의 명성은 지영수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장선행보다 더 대단한 의사를 섭외한 상태였다. 만약 그 사람이 안 된다면 장선행이 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 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의사를 섭외한 상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