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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조승철은 즉각 태도를 바꾸며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설인아를 쏘아봤다. “우리 도련님이 봐준다고 하니까 배상하면 신고는 하지 않을게요.” “지금 나보고 배상하라고요?” 설인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고는 내가 해요.” “아, 진짜...” 당황한 조승철이 자기도 모르게 육진수를 힐끔 쳐다봤다. 책임지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안에 탄 사람이 톱스타인 데다 급한 일이 있는 게 문제였다. 차를 한 대 바꾸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한편, 차창을 열어둔 덕분에 설인아의 목소리를 들은 육진수가 얼굴을 굳히더니 틈으로 설인아를 노려봤다. “설인아. 그만하지?” 설인아는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말투를 들어보면 육진수가 오늘 이곳을 지나갈 거라는 걸 설인아가 미리 알고 일부러 차를 박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전에는 육진수가 이렇게 제멋대로 인 줄은 몰랐다. “설인아. 앞으로 이렇게 유치한 수작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설인아가 어이없어하는데 육진수는 설인아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조승철, 타.” 조승철은 육진수가 새로 채용한 운전기사였기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멍한 표정으로 대꾸하고는 차에 오르려 했다. 그때 설인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가면 뺑소니야. 내가 정보 흘리면 기사 나는 건 한순간일 텐데 괜찮겠어?” 조승철이 설인아를 노려봤다. 육진수의 표정도 아까와는 달리 훨씬 날카로워졌다. “설인아. 나 지금 너랑 이럴 시간 없어.” 설인아가 차갑게 웃었다.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차를 수리하는 데도 돈이 드는데 설인아가 육진수를 이대로 보낼 리가 없었다. “진수 씨가 무슨 자격으로 시간이 없다는 거야. 딱 1분 줄게.” 설인아가 핸드폰을 꺼내자 조승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육진수를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온몸으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육진수를 보고 당황하며 바로 잘못을 인정했을 텐데 지금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버티고 서 있는 설인아를 보며 육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진심이야? 설마. 또 허튼수작 부리는 거겠지.’ 육진수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설인아.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어. 내 성격 알잖아. 그래도 계속...” 육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인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50초 남았다.” 열린 창문 틈으로 설인아의 두 눈을 마주한 육진수가 살짝 놀랐다. 실랑이를 벌인지는 꽤 됐지만 육진수는 그제야 설인아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며칠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았지만 꿀이 뚝뚝 떨어지던 두 눈은 이제 덤덤함과 차가움만 남아있었다. 변해버린 설인아의 모습에 육진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설인아가 그런 육진수를 차갑게 노려봤다. “육진수 씨, 오만한 추측은 이제 그만 넣어둬. 난 인간쓰레기 따윈 관심 없으니까.” “너 정말...” 육진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담았다. 다만 설인아도 더는 육진수와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 차 찌그러진 거 봤지? 2억 주면 그냥 넘어갈 생각 있는데.” 육진수는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이 궁했나 보네. 2억이나 지르는 걸 보면.” 조승철이 설인아가 끌고 온 차를 힐끔 쳐다보더니 안색이 살짝 변했다. “혀... 형... 저 여자가 가져온 차 한정판 퓨라리에요...” 2억을 부른 건 절대 돈이 궁해서 부른 게 아니었다. ‘한정판? 시훈 씨가 이렇게 좋은 차를 줬다고?’ 끌고 나올 때는 자세히 보지 않아 설인아는 이 차가 퓨라리인줄도 몰랐다. ‘2억이면 너무 적게 부른 건가?’ 조승철은 차를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육진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설인아를 바라봤다. “차 어디서 났어?” 설씨 가문에서 설인아에게 이렇게 비싼 차를 사주진 않았을 것이다. 설인아가 앵두 같은 입술로 웃었다. “똥차 버리고 비싼 차로 갈아탔다고 해야 하나?” “설인아.” 육진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한 건가? 이상하게 말에 힘이 생겼다 했더니 다른 남자를 만난 거였어? 아닌데. 설인아는 나 아니면 안 되는데. 또 내 눈길을 끌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뭐 차는 렌탈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육진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설인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말이 많네. 5초 줄게. 그래도 안 주면 신고한다.” “조승철. 돈 보내.” “형...” 조승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육진수를 바라보더니 설인아를 노려봤다. “운 좋은 줄 알아요. 형이 급한 일만 없었어도 그쪽한테 삥 뜯기진 않았을 거예요.” 조승철이 욕설을 퍼부으며 설인아에게 계좌번호를 받아 가더니 이내 돈을 보내왔다. 그 과정에 설인아는 육진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진수는 설인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날카로운 눈동자였지만 눈앞에 선 설인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돈을 받은 설인아는 육진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리는데 뒤에서 분노에 찬 육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인아. 내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지. 급한 일만 끝내면 너희 아버지랑 얘기 좀 나눠봐야겠다.” 설인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설인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끌고 온 차에 올라타 한 빌딩으로 향했다. 그대로 꼭대기 층에 올라간 설인아는 한 사무실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노크했다. “들어와요.” 깔끔한 목소리가 들리자 설인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성주원, 설인아보다는 3살 많았지만 애티 나는 얼굴에 뽀얀 피부의 소유자라 겉보기엔 설인아보다 어려 보였다. 설인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3년만인데 넌 어떻게 아직도 어린애 같냐?” 고개를 든 성주원이 설인아를 보고는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난, 여긴 어쩐 일이야?” 청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랄 이름이었다. 청난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의사였다. 저승사자도 망자를 데리러 왔다가 허탕을 친다는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신급의 의사가 2년 전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성주원은 청난의 매니저로서 의학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된 두 사람은 목숨을 나눈 친구였다. 성주원이 성큼성큼 설인아에게로 다가갔다. 원래도 애티 나는 얼굴에 흥분까지 하자 설인아도 당해내기 힘들어 입꼬리를 당겼다. “네가 급하다고 꼭 한번 오라며. 그래서 왔더니 고작 그런 표정이야?” “아니 그건 내가 100번 불러야 1번 나타나니까 그러지.” 성주원이 웃으며 불평을 늘어놓더니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저번에 본 게 2년 전이야. 2년 전. 드디어 나타났네.” 성주원은 설인아가 도망갈까 봐 그러는지 씩씩거리며 설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 설인아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전에는 남자에 눈이 멀어서 정신을 못 차렸는데 이젠 아니야. 부르면 언제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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